스물일곱 살의 젊은 여성 소설가 최용진씨가 ‘그들’의 촛불 시위에 함께 했다. 최씨가 시위대에서 눈여겨 본 것은 ‘그들’이 보는 미국과 ‘그들’의 감정 표현법들. 이틀간의 취재를 마친 최 작가는 “이 글은 한 젊은 작가가 ‘그들’에게 바치는 연가(戀歌)”라고 덧붙였다.
12월5일 저녁 6시30분 교보문고 뒤편
광화문이 불렀다고 해야 할까. 내 이름 앞으로 날아온 초대장도 없었건만 시간이 되자 나는 그곳에 있었다. 엉겁결에 누군가로부터 촛불을 받아들고 군중 속에 섞여들었다. “효순이를 살려내라! 미선이를 살려내라!” 뜨거운 구호에 이어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내가 아는 최고의 아가(雅歌)이자 애가(哀歌)인 그 노래를 예사로 부를 수는 없었기에, 목에 뜨거운 기운이 돌 때까지 다지고 또 다져서 토해내려 했다. 그때 내 옆에 선 두 여고생은 아리랑에 화음을 넣고 있었다. 비장한 군중들 틈에서 ‘그들’은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아리랑에 이어 이번에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울려 퍼졌다. 두 여고생은 그 곡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잠시 촛불만 흔들던 ‘그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몸을 조금씩 흔들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민중가요에 리듬을 타고, 아리랑에 화음을 넣는 ‘그들’. 그때부터 나는 ‘그들’을 찾아다녔다.
촛불 시위대는 교보문고 뒷편을 벗어나 ‘열린시민공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경찰들이 시위대를 가로막았다. 위험스런 대치 상황은 아니었으나 시위대는 분노했다. “비켜라! 비켜라!” “평화시위 보장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이 나라에서 오랜 세월 되풀이된 후렴구였으나 ‘그들’은 낯설게 외쳐대고 있었다.
채 스무 살이 안 되었거나, 갓 스무 살을 넘긴 ‘그들’로서는 처음 겪는 일일 법도 했다. 경찰저지선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위대 중 누군가가 “도로로 나가자”고 외쳤다. 그러자 교복 차림에 여드름 자국이 있는 소년이 환호했다. “차도로 걸어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앗싸!” 시위대의 반미 구호가 한층 거세지자 경찰은 촛불을 끄는 조건으로 길목을 터 주었다. 시위대는 촛불을 끄고 경찰저지선을 뚫고 나와서 다시 촛불을 켰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전경들, 저 인간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야?” 그러자 누군가 응수했다.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지. 전경들이 뭔 잘못이야?” ‘그들’은 기성세대보다 공권력에 대해 관대했다. ‘그들’에게 공공의 적은 오직 미국뿐이었다.
▲ 지난 7일 밤 미국대사관앞.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열린시민공원에 인터넷 가요 ‘Fucking U.S.A’가 울려 퍼지자 ‘그들’은 중지를 힘껏 뻗어 허공을 찌르며 환호했다. 할리우드가 ‘그들’에게 전수한 방법으로 ‘그들’은 할리우드의 나라, 미국을 엿먹이고 있었다. “Give me chocolate”의 열등감이 없는 ‘그들’에게 미국은 그저 미국일 뿐이었다.
‘Fucking U.S.A’를 너무나 신나게 따라 부르던 한 고등학생에게 ‘미국이 왜 그렇게 싫으냐’고 물었다. 단박에 안톤 오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굳이 노근리를 들먹이지 않고도 안톤 오노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괘씸했던 미국이었다. 그 미국이 이번에는 한국의 두 소녀를 짓밟아 죽인 것이었다.
추운 밤, 음악회는 늦은 시각까지 계속됐지만 ‘그들’은 자리를 지켰다. 무대에서 효순이와 미선이를 위한 시가 낭송되자 ‘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아프다, 아파서 화가 난다! 열린시민공원의 풍경은 그 아픔과 분노에 공감한 ‘그들’의 ‘촛불 벙개’였다.
12월7일 저녁 5시30분 교보문고 뒤편
광화문에는 평일과는 규모가 다른 촛불 시위가 펼쳐졌다. 촛불을 잊지 못하고, ‘그들’을 잊을 수 없었던 나는 다시 그곳에 섰다. 시위대 초입에서 개당 천원에 초를 파는 아줌마의 상술, 시위장에 비장한 얼굴을 드러낸 대선 후보들의 또 다른 상술.
나는 그 광경을 뒤로한 채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나타난 연인 한 쌍을 좇았다. 촛불을 구하지 못한 ‘그들’은 휴대폰 액정의 불빛을 흔들며 노래를 했다. 어떻게 촛불 시위에 오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요즘엔 인터넷 메신저에 삼베를 달고 하루 종일 반미 얘기만 주고받는다 했다. 국민들이 월드컵 때만큼 단결하면 분명히 SOFA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 재수 없어”를 넘어 ‘재수 없는 미국과의 관계 정립’에도 관심을 보였다. 촛불 시위대 복판에서 불온하게도 촛불을 들지 않은 채 무언가를 끼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중학생들이 들이닥쳤다. “우리 인터뷰 잘해요. 우리랑 인터뷰해요.” 나를 기자로 착각한 것이었다.
학생들과 얘기하고픈 마음에 기자 행세를 했다(용서하시길). 촛불 시위에 참여한 경위를 묻자 대답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학교 홈페이지 올려진 글들을 보고 참석하게 되었어요.” “수업시간에 자료화면도 많이 보여줘요. 특히 기술 선생님이 많이 보여줬어요.” 그러면서 저쪽에 서 있는 기술 선생님을 콕 찍어 보이는 아이다움도 잊지 않았다.
은폐가 불가능한 세대 앞에서 이제 기성세대도 변해 가는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미군부대에 계셔서 미군을 좋게 생각해왔는데 이번 일 계기로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들’은 앞선 세대들이 쉬이 잃곤 하던 ‘개체성’을 복원하고 있었다.
누군가 의사 욕을 하면 부모가 의사인 아이들이 발끈하고, 선생 욕을 하면 부모가 선생인 아이들이 들고일어나던 세대는 이제 막을 내렸나보다. 이 사회에도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12월7일 저녁 8시30분 미국 대사관 앞
‘그들’ 중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효순이를 살려내라! 미선이를 살려내라! 대사관의 담을 넘는 구호가 ‘그들’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 미선이….” 미선이 어머니가 마이크를 잡자 ‘그들’ 대부분이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 힘내세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촛불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광화문은 월드컵의 열기를 재현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강제동원령을 받고 온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제안한 촛불 시위에 모두가 ‘나’의 자격으로 동참한 것이다. 촛불 시위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는 없었다.
네티즌이란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해 보였고, 반미세대라는 유행어가 있긴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을 축소하는 것 같아 탐탁지 않았고, 단순히 붉은 악마의 후예들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아픈 축제를 치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그들’로 남기기로 했다.
‘그들’은 인터넷 메신저에 삼베를 달고 각종 게시판을 도배하고, 리플을 달고, 한 줄 답변에 열을 올렸다. ‘그들’의 에너지는 지역 감정, 계층 갈등 등 기성세대가 물려준 불온한 유산들을 처분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나, 나의 고향과 나를 구분할 줄 아는 개인주의자들로서 모든 일을 ‘나의 상식’에 비춰 판단한다. 이 즈음 ‘그들’ 각자의 상식은 효순이 미선이의 일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내지르고 있다.
최용진 소설가는? 1976년생.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졸업. 2000년 <문학세계>에 단편 ‘씨앗’으로 데뷔. 이후 <조선문학>, <예술세계> 등의 지면에서 작품활동. <전파>, <야곱의 우물> 등에 서평, 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