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수 검찰총장. | ||
검찰의 ‘SK 비자금 수사’가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심장부를 향해 치달으면서 정치권 전체가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궁지에 몰린 여·야는 과거 정치자금 일체에 대한 ‘고해성사 뒤 사면’ 등 다양한 대책을 논의중이나, 검찰은 한번 빼든 칼을 쉽사리 거둬들일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지금까지 드러난 검찰의 SK 수사 방향은 크게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1백억원 수수와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11억원 수수 등 두 갈래로 나눠진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대선자금과 관련한 검찰 수사는 지난해 대선 당시 당 재정위원장이던 최돈웅 의원을 넘어 ‘앞으로 앞으로’ 향하고 있다. 최 의원도 이미 지난주 검찰 소환조사 때 SK 돈 1백억원이 중앙당 재정국 등 당 차원에서 모금되고 사용됐음을 시인했다고 밝힌 상태다.
이에 따라 검찰은 1백억원의 사용처와 사전 공모 여부 등을 밝히기 위해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으로 중앙선거대책본부 총괄본부장을 지낸 김영일 의원, 서청원 당시 대표 등 핵심 지도부의 소환 조사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검찰은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이회창 전 총재가 1백억원 수수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거나 사후 보고를 받았을 가능성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얘기도 검찰 주변에서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설마 검찰이 대통령 후보를 지냈고 본인의 정계 은퇴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강한 ‘정치권력’인 이 전 총재까지 조사하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있지만 요즘 검찰 분위기를 보면 모를 일이다.
검찰은 일찍이 나라종금 로비의혹 사건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던 염동연씨를 교도소로 보내고, 안희정씨를 두 차례의 구속영장 청구 끝에 재판에 넘긴 데 이어 지난 16일에는 노 대통령의 ‘집사’인 최도술씨를 구속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노 대통령이 최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송두율 교수에 대한 ‘포용과 선처’를 호소했건만 서울지검은 “사안이 중대하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 송 교수를 전격 구속했다. 이처럼 행정 수반이자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검찰이 야당의 반발이나 압력에 따라 수사 흐름을 바꿀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실제로 송광수 검찰총장은 지난 24일 출입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SK 수사와 관련해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로부터 ‘압력성 전화’를 받은 것과 관련해 “그것을 압력으로 느낀다면 검사들이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 그런 것 막아주라고 총장이 있는 것”이라고 단호한 ‘항전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대선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의 최고 정점인 이 전 총재에게까지 수사 칼날이 미칠 것이냐보다 훨씬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번 수사가 SK 이외의 다른 재벌기업의 정치자금 문제까지 파고들 것인가다.
▲ SK비자금 수사를 맡은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 ||
강금실 법무부 장관도 지난 23일 국회 답변을 통해 “전방위적 사정을 하도록 검찰을 독려하겠다”며 한나라당이 SK 외에 다른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최병렬 대표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검찰을 향해 “우리 당만 표적 삼아 계좌추적 등을 할 경우 좌시하지 않겠다”며 협박을 하는 등 배수진을 친 듯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검찰이 그 정도까지 진도를 나갈 것 같지는 않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만약 대선자금 전체에 손을 댈 경우 어느 선에서 수사를 매듭지어야 할지 ‘견적’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검사는 “아마 대검 중수부 인력 전체를 총동원해도 1년은 매달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의 어려움보다 더 큰 장애물은 바닥을 기고 있는 경제상황이다. 만약 다른 재벌기업의 정치자금까지 파헤칠 경우 SK 손길승 회장처럼 재벌총수와 최고 경영진들의 소환조사가 불가피하고, 그렇게 되면 기업활동이 위축돼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의 한 관계자는 “수사팀이 계좌추적 얘기를 흘리는 것은 최돈웅 의원 등을 심리적으로 압박해 돈의 모금 경위와 사용처 등에 대한 자발적인 진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 실제 하겠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최도술씨의 11억원 수수 사건 역시 어디로 불똥이 튈지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금액만 따진다면 한나라당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훨씬 강력한 파괴력을 낳을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일단 검찰은 지난 24일 중간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최씨가 손길승 회장한테 받은 11억원 가운데 4억여원은 최씨와 고교선배 이영로씨가 주식투자금 등으로 사용한 것을 확인했으나, 현금으로 인출된 3억원 등 용처가 불분명한 나머지 6억여원에 대해서는 자금추적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최씨의 차명계좌에 드나든 SK 자금 이외의 돈의 출처 등도 조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수사에서 최대 관심사는 노 대통령이 연루된 부분이 나올 것인지다. 노 대통령과 최씨의 특수관계를 감안할 때 최씨가 기업체에서 받은 돈을 노 대통령이 선거자금 등으로 사용한 흔적이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그런 상황이 도래하면 노 대통령은 돈의 출처를 알고 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것이 뻔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에 대한 전면수사를 요구하고 나설 것이고, 정국은 다시 한번 요동칠 것이다. 노 대통령이 일찌감치 ‘재신임 투표’ 선언을 하고 나선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여하튼 검찰은 이번 SK 비자금 수사를 계기로 정치권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관행에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여·야 모두에게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만약 한나라당이 먼저, 또는 다른 당과 함께 국민 앞에 과거 정치자금과 관련한 ‘양심선언’을 하고 용서를 구하면 검찰로서도 더 이상 수사를 확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며 “그러나 정치권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버틸 경우 현재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검찰이 먼저 칼을 거둬들일 것 같지는 않다”고 전망했다.
물론 정치권이 ‘참회’를 한다고 해도 검찰로서는 정치자금 수수과정에서 명백한 불법행위를 한 정치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기 때문에 일부 관련자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안대희 중수부장이 일전에 언급한 ‘부정 축재 정치인’들의 실체가 조만간 드러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검찰 주변에서는 수사팀이 현대 및 SK 비자금 수사과정에서 정치자금으로 받은 돈을 개인 축재에 사용한 국회의원 2~3명을 적발해 수사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