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31일 오후 주한 필리핀 대사관 해외인력과에 한 명의 한국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자신을 한상일(가명)이라고 소개한 뒤 ‘몇 명의 필리핀 여성들이 동두천의 한 클럽에서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사실 한씨는 지난 3월 초 문제의 필리핀 여성 11명을 현지에서 모집한 뒤 방콕을 거쳐 한국의 인력송출회사에 넘긴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사와 클럽에 엄청난 빚을 진 상태에서 빚 독촉을 받아오다 이날 대사관에 모든 사실을 ‘신고’해 버린 것이다.
▲ 러시아 무희의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 ||
이 사건을 처음 접한 사람은 필리핀 대사관의 노무관 콘페리도씨(43)였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망설이던 그는 결국 한국 경찰에 이 사실을 신고하게 된다. 콘페리도씨는 이 과정에서 한국 경찰들과 함께 동두천 기지촌을 4~5차례 직접 둘러보기도 했다. 드디어 신고 17일 뒤인 지난 6월17일 밤 10시에 경찰과 대사관측은 문제의 클럽을 ‘급습’했다. 이때 필리핀 여성들 모두는 그날 ‘실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몇 시간째 홀에서 가만히 서 있는 ‘벌’을 받고 있었다. 이들이 경찰에 털어놓은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필리핀 여성들은 성 매매뿐만 아니라 온갖 학대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11명은 클럽 2층의 방 두 곳에 감금된 채 살고 있었다. 창문은 물론 창살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절대로 외출은 허용되지 않았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두 명이 밖에 나가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었는데 물론 ‘매니저’와 함께였다. 아파도 병원에도 잘 데려다 주지 않았다. 이들이 받은 돈은 일주일에 식대 1만원뿐이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쌀과 햄, 라면 등을 사서 연명했다. 약속한 월급 4백80달러(약 57만6천원)는 한 번도 지급되지 않았다. 업주는 때때로 이들의 ‘매출’이 저조하면 아침 8시까지 밤새 홀 위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욕설과 함께 구타도 행해졌다. 스타킹도 없이 길이 20cm의 스커트와 비키니만 걸친 채 추위에 떨기도 했다.이런 와중에서 학대를 참지 못한 4명의 여성이 한 미군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업주와 친한 한 미군의 ‘밀고’로 4명 모두 다시 클럽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그뒤 11명 모두는 함께 다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기회만 노리던 차에 자신들을 한국의 ‘지옥’으로 데려온 한씨의 신고로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지난 3월 예술흥행(E-6)비자로 입국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자가 면제되는 방콕의 한국대사관에서 ‘손쉽게’ 이 비자를 받았다고 한다. 현재 한국 유흥업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외국 여성들이 이 예술흥행비자를 받고 입국하는데 근본적으로 우리 출입국관리시스템에 허점이 있다는 것.
이들 11명의 필리핀 여성들은 지난 6월 말 윤락행위방지법 위반으로 강제추방됐다. 그뒤 업주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지금은 집행유예로 풀려난 상태다. 하지만 이것으로 ‘사건’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 국제이주기구 서울본부가 작성해 제네바본부에 제출한 보고서. | ||
이번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필리핀 대사관 노무관 콘페리도씨는 “외국여성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성 착취를 일삼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 땅에서 감금당한 채 폭언과 폭행, 강제윤락에 시달렸을 그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한국-필리핀 간의 외교문제 비화에 대해선 목소리를 낮췄다. 콘페리도씨는 “이 사건은 피해여성과 업주 사이에 일어난 개인 사건이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이번 사건을 파헤치는 데 한국 정부도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또한 제네바 본부에 보고서를 보낸 국제이주기구(IMO) 서울본부 고현웅씨도 이번 사건의 확대해석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냈다. 고씨는 “이번 사건을 한국의 체면을 구긴 일이라고만 생각해선 안된다. 물론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인신매매와 매매춘은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을 기회로 한국의 예술흥행비자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신매매 재발 방지를 위한 정부 대책을 확실하게 수립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손해배상소송건에 대해서도 “소송비용이 만만찮아 알아보던 중 필리핀 대사관측에서 정부예산이 있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필리핀 대사관측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인 모임’ 추천으로 이상희 변호사(30)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하고 본국정부로부터 소송비용을 지원받기로 했다. 이 변호사는 “소송가액은 1인당 2천만원 정도로 대사관측이 비용을 내는 대로 서울지법에 소장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손해배상소송은 이미 해당업소 업주가 형사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터라 원고측 승소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에게 배상금이 지급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쓰라린 생채기를 치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