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교클럽 | ||
실제로 그랬다. 그들이 노는 물은 ‘수질’부터 달랐다. 검문검색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특수부대처럼 이들의 모임에는 일정한 자격요건을 갖춘 이들만 입장이 가능했다. 설사 요건을 갖추고 있더라도 사전에 별도의 심사를 받아야 했다. 바로 명문대 출신들만의 사교모임이던 ‘F클럽’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 ‘엘리트들의 사교장’으로 불리던 F클럽의 실체가 최근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이들 모임의 운영자가 ‘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사교파티 전문업체 대표 하영준씨(가명?0)가 그 장본인.
하씨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운영해 온 이 사교클럽은 S대 Y대 K대와 E여대 등 이른바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만을 유료회원으로 받았던 ‘상류 클럽’.
하씨는 회원들끼리 주고받는 인터넷 쪽지를 몰래 훔쳐보다 최근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구속됐다. 혐의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불법감청).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씨가 회원들의 쪽지를 훔쳐 본 이유. 그는 클럽의 ‘수질’ 관리를 위해 틈틈이 회원 간의 쪽지를 엿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문제(?) 회원을 클럽에서 제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 기준은 하씨가 임의로 정한 것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하씨가 운영하는 이 파티전문 사교클럽의 회원 수는 무려 3만5천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운영자측이 마련하는 각종 이벤트에 참가할 자격을 갖춘 엘리트 유료회원은 8백여 명. 하씨는 지난해 8월부터 올 4월까지 유료회원들 간에 오가는 인터넷 쪽지를 상습적으로 몰래 감청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예전에 S업체의 관리자가 직원들의 이메일을 불법감청한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지만 이 경우는 죄질이 다르다.
경찰 관계자는 “하씨의 경우 S업체와 달리 자신이 고용하지도 않은 제 3자들, 특히 남녀간에 감정 섞인 극히 사적인 내용을 훤히 들여다본 것”이라며 “더욱 문제가 된 점은 하씨가 쪽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회원들의 성향을 판단해 퇴출시키는 소위 ‘물관리’를 하는 등 불법정보를 불미스러운 데 활용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하씨는 수사초기 “쪽지와 관련된 시스템을 정비하다가 우연히 내용을 보게 된 것”이라고 버티다가 경찰의 추궁이 계속되자 “회원관리를 위해 보았다”고 실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혐의가 받아들여져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웹사이트 운영자가 회원관리를 목적으로 회원간 통신을 감청한 첫 사례”라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가장 황당해하는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 유료회원들. S대 출신인 회원 A씨는 “목욕하는 모습을 몰래카메라에 찍힌 듯한 수치스러움과 분노를 느낀다”면서 “회원들간에 운영자가 우리들 이야기(인터넷 쪽지)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사실로 확인되니 기가 막히다”고 말했다.
▲ 감청모습 | ||
하씨는 엿보기를 통해 파악한 회원들의 기호나 정보를 가지고 ‘무불통지’의 능력을 과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회원들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이에 따라 갖가지 파티를 열고 화두를 꺼냄으로써 자신의 카리스마를 높였던 것. 하씨의 은밀한 행위가 드러난 것은 하씨 자신의 그런 언행 때문이기도 했다.
회원 B씨는 “하씨가 모임 때 ‘누구누구는 모임이 끝나고 인상 깊은 일에 대해 회원들과 의견을 주고 받으며 동료애를 돈독히 하는데 참 모습이 좋더라’고 말한다거나 ‘이벤트에 열심히 참가한 사람에게 칭찬의 글을 많이 보내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하씨가 혹 우리 쪽지를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섬뜩했다”고 말했다. 일부 회원들이 품었던 이런 의심이 결국 경찰 수사로까지 이어지게 됐던 것.
하씨의 쪽지 엿보기를 통한 ‘물관리’ 때문에 회원들 가운데는 영문도 모른 채 ‘자격을 박탈당하는 처지’에 몰렸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한때 F클럽 회원이었다는 C씨는 “언제부터인가 주최측에서 따돌리는 것 같고, 자꾸 눈치를 줘 기분이 불쾌했었다”고 말했다.회원들 간의 쪽지가 제3자에게 읽힌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치명적인 일일 수도 있다고 회원들은 입을 모은다. 왜냐하면 이 모임에는 유부남, 유부녀, 미혼남녀가 모두 뒤섞여 있기 때문에 쪽지에 따라서는 비밀스런 부분이 담겨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회원들에 따르면 사교모임은 주로 호텔이나 고급레스토랑 등 ‘품위’있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회원 간 친밀도가 높은 소그룹에선 하씨가 미혼여성회원들에게 수영복을 입고 오라고 권해 이른바 즉석 패션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행사가 끝난 뒤 ‘수영복 모델’로 나섰던 여성회원들에게 쪽지가 쇄도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유부남 회원들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없는 상태. 쪽지엔 과연 어떤 말들이 적혀 있었을까. 구애의 내용이나 유혹의 글들은 없었을까. 정확한 사실은 쪽지를 받은 당사자와 이번에 구속된 하씨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회원 D씨는 “돌이켜보니 뭐에 홀린 것 같다”면서 “회원들은 모임 때마다 하씨가 하라는 대로 복장을 갖추고 나갔으며, 당시엔 그렇게 따르는 게 즐거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누구를 즐겁게 하기 위한 자리인지 헷갈린다”고 밝혔다. 하씨는 ‘회원들을 위해 불량회원은 걸러야 했기에 쪽지를 본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고 경찰은 전했다.
하씨 자신도 명문대를 나온 최고 엘리트여서 그의 행동에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대체 왜 그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엿보기를 계속했던 걸까. 단순히 ‘물 관리’ 때문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쪽지의 내용을 하씨가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밤잠을 설치는 엘리트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박상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