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원주 유세에서 ‘노사모’로부터 선물 받은 진짜 ‘희망돼지’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노 당선자. 임준선 기자 | ||
[서울법대보다 상고가 세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난 97년에 이어 올해 선거에서도 상고 출신 후보자에게 연거푸 고배를 마신 데서 기인한 말이다. 97년 이회창 후보에게 낙선의 아픔을 안겨줬던 김대중 후보는 목포상고 출신.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이 후보를 누른 노무현 당선자 역시 부산상고를 나왔다. 공교롭게 두 차례 대선에서 이 후보를 꺾은 상대 모두가 상고 출신인 까닭에 생겨난 우스개인 셈.
서울대 출신들도 이런 불안한 조짐을 일찌감치 감지했던 탓일까.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로 유명한 서울대 건축공학과 출신의 이원복 덕성여대 교수(56)는 ‘서울대 동창회보’ 4월호에 그린 만평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만평 내용은 이렇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장대를 잡고 ‘상고(商高)’라는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는 장대 높이뛰기 선수로 묘사됐다. 그리고 만평의 왼쪽 상단에 그려진 높이뛰기 기록판에는 ‘1차 ×’라고 적혀있다. 이는 1차 시도, 즉 97년 대선에서는 목포상고 출신인 김대중 후보에게 패했다는 것을 암시한 대목. 그러면서 ‘2차’에서는 과연 성공할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만평으로 인해 이 교수는 ‘학벌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어찌됐건 서울대 출신 후보의 상고 뛰어넘기는 이번 2차 시도에서도 실패한 셈이 됐다.
▲ 대선 유세 도중 희망돼지(왼쪽)과 즉석성금이 든 비닐봉 투를 보며 기뻐하고 있는 노무현 당선자. | ||
각 후보 진영의 세 대결이 한창이던 올 여름 정가에 ‘대통령 도돌이표 예언’이 나돌아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도돌이표는 악곡의 어떤 부분을 되풀이하라는 뜻. 따라서 대통령 도돌이표 예언은 대통령의 성(姓)씨가 김대중 대통령을 기점으로 해서 다시 역으로 반복된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소문이었다.
문제의 예언 내용은 이렇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성(姓)씨를 보면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이, 윤, 박, 최, 전, 노, 김, 김씨 순서였다.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같은 성씨인 김대중 대통령을 반환점으로 해서 다시 역순을 밟게 돼 결국 노씨 성을 가진 인물이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천기누설’이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번 대선에서 이 ‘예언’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노무현 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됐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이 도돌이표 예언대로라면 노무현 대통령 다음에는 전씨 성을 가진 인물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황당한 이야기가 최근 나돌고 있는 것.
[진짜 ‘젊은 피’가 필요해]
이번 대선은 20~30대와 50대 이상 유권자의 세대간 투표성향이 극명하게 갈렸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체로 진보성향의 20~30대 젊은층은 노무현 후보를, 보수성향의 50대 이상 장년층은 이회창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그래서인지 선거 운동기간에도 상대적으로 노 후보 유세장에는 젊은 혈기가 넘쳤다.
이런 차이를 의식했기 때문일까. 이 후보측은 지난 대선 기간에 젊은 당원들을 유세 현장에 긴급 투입하곤 했다. 따로 대형버스 2대에 젊은이 80여명을 싣고 이 후보 유세장에 따라다녔다는 것. 이처럼 ‘젊은 피’를 긴급 수혈했던 것은 TV나 신문 등 언론매체에 실릴 유세장 사진을 어느 정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젊은층 지지율이 낮았던 이 후보 캠프에서 짜낸 고육책이었다. 이 후보의 지지계층이 젊은층에서 노년층까지 폭넓다는 점을 내보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충남 대천 일대 유세 때엔 이 후보를 지지하는 한 체육관 관장이 ‘건장한’ 고등학생들까지 현장에 동원하기도 했다. 관원인 고등학생 30여 명을 유세장에 집합시켰던 것. 하지만 젊은피이되 이들은 아직 유권자가 아니었다.
[돼지 오줌이 복 불렀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돼지 덕분이다.” 노 후보의 유세현장을 따라다녔던 전담 취재기자들이 자주 꺼내는 얘기다. 그만큼 이번 대선에서 노 후보와 돼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었다. 우선 노 당선자 지지자들이 선거운동 비용으로 사용하라고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걷었던 저금통 이름이 ‘희망돼지’다.
이때 노 후보는 돼지를 두 손으로 껴안고 가볍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런데 ‘사건’은 노 후보가 새끼돼지에게 입맞추는 순간 발생했다. 이 세기의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가 펑펑 터지는 데다 유권자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지자 놀란 새끼 돼지가 그만 노 후보의 코트에 ‘실례’를 했던 것. 수행원들의 얼굴표정이 굳어졌음은 물론. 다른 사람 같으면 오줌 자국을 가리기에 바빴을 순간 노 후보는 이 각본에도 없던 돌발상황을 “어, 우리 돼지가 오줌을 쌌네”라는 털털한 한 마디와 특유의 ‘하회탈 미소’로 가볍게 넘겼다.
돼지와의 인연은 부산 유세에서도 이어졌다. 노 후보는 대선 운동기간에만 6차례 정도 부산을 방문했다. 그런데 부산에서 주로 먹은 음식도 ‘돼지 국밥’. 돼지 내장과 순대 등이 들어가는 ‘순댓국’과 비슷한 음식을 노 후보와 당직자들은 ‘주식’으로 먹었다고 한다. 유세단에 동행했던 몇몇 사진기자들이 “돼지국밥에 아주 질렸다”며 고개를 내저었을 정도. 이렇듯 돼지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덕일까. 노 후보는 결국 대선에서 돼지꿈을 꾼 사람처럼 승리를 거머쥐었다.
[국민들을 빚쟁이로]
지난 11월27일 대구 칠성시장 앞 거리유세에서는 노 후보의 심금을 울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유세가 시작될 때만 해도 시장 사람들은 ‘노무현이 왔나보다’하는 정도로 먼발치에서 그냥 지켜보는 분위기였다. 시원찮은 호응에 힘이 빠질 만도 했지만 노 후보는 특유의 뚝심과 서민풍 화법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계속 두드렸다.
그런데 유세가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조용한 변화가 일어났다. 몇몇 시장 아줌마들이 연단 앞으로 다가와 웬 비닐봉지를 노 후보에게 건넸던 것. 봉지에는 매직 글씨로 ‘힘내세요’라고 씌어 있었다. 시장 아줌마들이 노 후보의 연설을 듣다 감동한 나머지 즉석에서 돈을 걷었던 것. 봉지 안에는 때묻은 수표와 만원짜리를 비롯한 지폐들이 담겨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도 한나라당 절대 우세지역인 대구에서 받은 ‘정치 헌금’이라 남다른 의미도 부여됐다.
얼떨결에 돈을 건네받은 노 후보는 “나는 돈만 보면 환장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농담한 뒤 “국민들의 돈으로 선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맙게 잘 사용하도록 하겠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에도 물기가 엿보였다. 즉석 모금은 다른 곳에서도 이어졌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한 50대 아줌마는 비린내 물씬 풍기는 치마 속에서 10만원짜리 수표를 꺼내 유세 나온 노 후보에게 선뜻 건넸다. “오늘 하루 번 돈이니 가져가서 정치를 잘 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노 후보는 아줌마의 손을 꼭 붙잡고서 “감사합니다. 이 빚은 제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쌈짓돈, 희망돼지…. 노 후보는 이렇듯 많은 서민들을 ‘빚쟁이’로 만들었다. 빚진 사람이 성공해 ‘이자’까지 갚기를 바라는 것이 빚쟁이들의 공통된 심리. 자연 노 후보에 대한 지지도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국민 빚쟁이 만들기’가 노 후보의 가장 훌륭한 승리전략이 됐던 셈. 이젠 노 당선자 스스로 이야기하듯 서민들에게 진 큰빚을 갚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