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와 CP로 자금을 끌어들인 효과는 총수일가의 경영권 지키기에도 유리하게 나타나고 있다. 구윤성 인턴기자
지주사인 (주)동양의 연결재무제표(종속회사 재무상황까지 모두 반영된 재무제표)를 보면 올 6월 말까지 자기자본은 2032억 원, 부채는 무려 3조 1147억 원이었다. 금융기관에서 빌린 차입금(단기 8318억 원, 장기 4161억 원)만 이미 1조 2479억 원에 달했다. 자기자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이미 금융권에서 빌린 마당에 돈을 더 끌어오려면 경영간섭 등과 같은 까다로운 족쇄를 차야 한다. 이미 동양은 산업은행과 여러 차례 경영정상화를 위한 약정을 체결했다.
이와 달리 일반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회사채나 CP 발행은 까다로운 조건이 붙지 않는다. 이자를 좀 더 쳐줘야 하지만 금융권 차입 과정에서의 번거로움보다는 낫다. 회사채의 경우 발행신고서를 내는 등 절차가 까다롭고, 또 기관투자자들은 동양과 같은 부실기업의 투기등급 채권에는 아예 투자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CP는 이 같은 절차나 기준이 없다. 그냥 찍으면 그만이다. 만기가 90일로 짧은 게 흠이지만, 또 찍어서 돌려 막으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오래 빌려야 할 필요성이 생기면 옵션이 달린 회사채를 주로 개인들을 대상으로 발행한다. 투기등급 채권이다 보니 보유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자를 더 쳐주는 회사채인데, 일각에서는 동양이 이 같은 옵션부회사채를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사실상 유동성 위기 상황에 돌입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한 증권사 신용분석연구원은 “이미 대우자동차판매 사태, LIG건설 사태 때도 입증됐지만 CP 발행은 판매해 줄 곳만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가장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이다”며 “투자자들은 설마설마 하면서도 고금리 유혹에 넘어가고, 증권사들은 짭짤한 판매수수료도 챙길 수 있어 얼핏 1석3조다. 다만 모든 투자 책임은 투자자가 져야 한다”고 말했다.
10월 4일 오후 서울 금융감독원 민원센터에 설치된 동양그룹관련금융상품 불완전판매 신고센터에는 많은 민원인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9월 30일 법정관리에 임박해서도 1000억 원 상당의 CP를 발행한 것은 사실상 투자자에게 ‘독약’을 판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돈을 맡긴 뒤 자신이 원하는 곳에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특정금전신탁 형식을 빌려 동양 CP를 사도록 유도하는 등 지능적인 수법도 동원했다. 동양증권을 상대로 투자자들의 집단소송이 어렵고, 개별 ‘줄소송’으로 따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정금전신탁 형식은 ‘속아서 투자했다’는, 불완전판매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회사채와 CP로 자금을 끌어들인 효과는 총수일가의 경영권 지키기에도 유리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양그룹은 기업구조개선작업(워크아웃) 대신 기업회생절차 즉, 법정관리를 택했다. 채권단에게 사실상 경영권이 넘어가는 워크아웃과 달리, 법정관리가 받아들여지면 현 경영진이 관리인으로 유임될 가능성이 높다. 법정관리 체제에서도 채권자협의회가 권한을 갖지만 워크아웃 때보다는 힘이 약하다. 특히 회사채와 CP 투자자는 수많은 개인이다. 현재 알려진 동양 관련 회사채 및 CP 투자자 숫자는 4만 9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수만 명으로 나뉜 개인들은 전문성이나 협상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현재현 회장은 최근 언론에 보낸 이메일에서 “협력업체 등의 연쇄부도 등을 막기 위해 법원에 모든 결정을 맡길 수밖에 없다. 가족의 모든 경영권 포기가 자동으로 수반되었다”고 밝혔지만 “금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는 CP 전체의 차환이 은행의 협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걸고 지금도 변함없이 해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개인투자자들의 투자금을 은행권에서 대신 갚아주면, 회사 가치를 높이고 자산을 매각해서 은행에 빚을 갚겠다는 뜻이다.
그는 아울러 “최근 추가 대출이나 자산매각 등에 대한 뒤늦은 제안을 받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CP 전체의 차환 규모는 일부 우량 자산으로 해결할 수 있고, 이와 관련된 모든 일에 제 역할이 판단되는 시기에 저의 책임을 물어주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사태 해결 때까지 경영권을 행사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종합하면 현 회장은 4만 9000여 투자자의 손실과 협력업체 연쇄도산이라는 사회·경제적 충격을 줄이려면 은행이 동양에 돈을 빌려줘야 한다고 밝힌 셈이다.
한편 법정관리 수용과 현 경영진의 경영권 유지 여부는 법원이 결정하게 된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검사 출신인 현 회장은 서울지역 변호사로도 등록돼 있다. 법조계 인맥도 탄탄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