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임박해지면서 경찰은 이미 대통령후보들에게 파견할 정예 경호요원들을 선발해 놓은 상태. 하지만 각 후보 진영은 저마다 속사정 때문에 경찰 경호팀 수용 문제를 놓고 첨예한 물밑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정치 1번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현재 종로구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옥인동), 노무현 민주당 후보(명륜동1가), 그리고 국민통합21의 정몽준 의원(평창동)이 모여 살고 있다. 묘하게도 후보 3인의 세 집이 청와대를 가운데에 놓고 동서북쪽으로 감싸듯이 자리잡은 모습이다.
▲ 지난 9월27일 동국대 불교병원 개원식에 나란히 참석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선거법상 대통령후보에 대한 공식적인 경호는 대선 75일 전부터 가능하다. 이를 근거로 각 후보 진영에서는 경찰에 경호를 요청할 수 있다. 경찰청 또한 대선에 대비해 지난 10월9일 엄격한 자체 심사를 통해서 이미 87명의 정예 경호요원들을 선발해 놓은 상태다. 여야 유력 후보에겐 경감급을 팀장으로 하는 17명의 경호팀을 파견할 계획이다.
하지만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보 진영에는 이 가운데 8명씩의 기본 요원들만 파견됐을 뿐이다. 그나마 이들은 아직도 ‘현장’에 투입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경찰청 선발 요원들도 장기 대기 상태다. 각 후보들 집 주변 역시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기는커녕 오히려 경호 ‘무풍지대’에 놓인 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이ㆍ노 후보 진영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자리잡고 있다. 이미 한 차례의 대선 경험이 있는 이 후보측은 최근 들어 대중들과의 거리 접촉이 빈번해짐에 따라 경호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 후보의 신변을 위협하는 유ㆍ무형의 징후가 포착된 데다 ‘테러를 조심하라’는 지지자들의 염려 편지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12월10일 이 후보 암살설을 다룬 책이 일본에서 출간됐다’는 정보가 입수돼 당이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특히 최근 들어 폭발물에 의한 테러 가능성까지 점쳐지면서 이 후보 진영에선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기도 하다. 이 후보측은 폭발물 처리 전문가의 파견을 경찰청에 요청했고, 실제로 파견된 경찰 경호요원 가운데 몇몇은 폭발물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후보측은 공개적으로 경찰에 ‘정상 수준’의 경호팀 파견을 요청하지는 못하고 있다. 좀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노 후보측을 의식해서다. 노 후보측은 ‘서민 후보에게 대규모 경호가 왜 필요하냐’는 입장이다.
한나라당은 이를 노 후보측의 고도의 선거전략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각 후보들이 함께 참석하는 행사 자리에서 어느 한쪽의 후보에만 대규모 경호 요원들이 배치되는 모양새가 결코 좋게 보일 리가 없기 때문. 더군다나 노 후보는 어쨌든 현재 여권 후보다. 여권 후보도 수행 경호팀이 없는데, 야당 후보가 대규모 경호요원들을 대동하고 나타나면 그 자체만으로도 ‘권위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는 게 한나라당측의 고민이다.
반면 민주당측은 ‘아직 특별히 경호의 필요성을 못느낀다’는 입장이다. 노 후보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당분간은 경호 요원의 추가 파견 요청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드러내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경호와 관련해 양 후보 진영이 공통적으로 못마땅해 하는 점도 있다. 정 의원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이다. 경찰청 내규에 따르면 여야의 유력 정당 후보에겐 경감급 팀장을 비롯한 17명 정도의 대규모 경호팀이 파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타 군소 정당 후보에게는 경사급을 팀장으로 하는 3~4명 정도가 배치된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주요 경호대상에는 여야 두 후보뿐만 아니라, 정 의원도 포함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밝혔다. 다른 후보들 진영에서는 경찰의 세 후보 ‘동급 대우’가 현재 외형상 원내의원 1석에 불과한 국민통합21의 정 의원을 은근히 띄워주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분위기다. 각 후보 진영이 이렇듯 묘한 물밑 신경전을 벌이는 탓에 경호를 담당하는 경찰청 경호과 관계자들로서는 골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이ㆍ노 후보 진영과는 달리 정 의원측은 아직 경호 문제에 대해 이렇다할 입장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출마 선언만 했을 뿐 아직 정식으로 후보로 선출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세 후보의 집 중 가장 큰 정 의원의 평창동 집 주변은 요즘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한산하다.
평창파출소의 한 관계자는 “아직은 대선주자 집이라고 해서 따로 순찰을 나가거나 경비를 서는 일이 없다”고 밝혔다. 노 후보 자택을 관할하는 혜화파출소 관계자도 “서울청 경호계에서 별도의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선 순찰 및 경비의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이 후보의 자택을 관할하고 있는 옥인파출소측은 “기존에 설치되어 있는 초소에 경찰 및 방범대원이 교대로 순찰 근무를 돌고 있다”고 밝혀 다소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유야 어찌 됐든 대형 빌라에서 이사한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감명국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