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소형 녹음기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대화를 녹취하는 방법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방법이 되어버렸다. 레이저로 음성파장을 잡는 방법, 컴퓨터 모니터에 뜨는 모든 내용을 그대로 재생해내는 기술, 통신위성을 이용한 광역도청에 이르기까지 도청기술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이에 대응하는 도청 방지기술도 나란히 발전하고 있다. ‘톰과 제리’의 숨바꼭질처럼 물고 물리는 도청과 방지의 최첨단 기술을 우리도 몰래 한번 들여다보자.
서울의 한 보안업체는 모 수사기관으로부터 도청실태 파악을 위해 협조를 의뢰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도청전파를 확인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서울시내를 한번 둘러보자는 것이었다. 일행은 여의도를 출발해 마포 신촌 남대문을 거쳐 강남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포착된 도청 감지신호가 10여 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전화의 경우 통화중에만 전파가 발사되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적지 않은 건수였다. 그중에는 전화통화, 실내에서의 대화, 심지어 팩스 송수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청신호가 포함돼 있었다.
사실 도청의 전통적인 방법은 유선방식이었다. 이것은 전화선이나 교환기의 단자를 통해 대화를 도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부인에게 도청사실이 노출될 가능성이 많아 요즘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최근에는 무선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유선전화선 잭에 초소형 무선송신기를 넣어 통화내용을 외부로 송출하는 무선도청기를 말한다. 이 방법은 발각되더라도 ‘설치자’의 신원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도청자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 레이저빔 도청장치(위) 마이크로형 및콘크리트 내장형 도청장치(아래) | ||
이 방식은 도청 대상 목표빌딩의 특정 유리창을 타깃으로 정하여 레이저 빔을 발사한 뒤 되돌아오는 반사신호에 실려온 유리창의 진동에서 추출한 음성 성분을 분석하는 것이다. 레이저 도청기는 약 9백m까지의 음성정보 수집능력을 가졌는데 고층건물의 창측에 회의실이 위치할수록 엿듣기 영역도 넓어지고 그만큼 도청도 수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청기를 따로 설치할 필요도 없고 사후추적도 불가능해 외국 산업스파이들이 즐겨쓰는 수법이라고 한다.
한국통신보안 안교승 대표는 “이 방법은 도청기가 따로 없기 때문에 보안검색도 무용지물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상시 대응체제가 필요하다. 불특정 노이즈(잡음)를 임의로 유리창 등에 발사해 도청에 대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모든 전자파를 그대로 흡수해 외부 유출을 방지하는 벽지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이는 전투기 잠수함 등에서 이용되는 스텔스 기술을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는 한국통신보안레이저 도청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R-5000’이란 장비를 개발해 첨단보안장비의 국산화도 앞당기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최첨단 음성도청방식에는 전파반사형이 있다. 이 방법은 건물 신축공사 때 콘크리트 벽 사이에 특수 칩을 은폐시켜 놓고 여기에서 나오는 전파를 통해 대화를 엿듣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에 설치되어 수년 동안 미국의 주요정보가 구 소련에 고스란히 흘러가다 발각된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진 방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컴퓨터 화면 내용을 훔치는 기술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사생활 보호와 관련해서 전문가들은 컴퓨터 화면 훔치기가 음성도청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대부분의 컴퓨터 이용자들은 누군가가 내 이메일을 몰래 훔쳐보고, 내가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했는지 알아낼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특수장비를 이용해 정부나 정보기관의 각종 비밀들을 고스란히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모든 컴퓨터의 비디오 디스플레이 단말기는 고유의 무선주파를 방출하고, 무선주파는 특정 컴퓨터나 사무실에 방향을 맞춘 ‘지향성 안테나’에 포착된다. 이 주파를 흔히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장비로 증폭하면 원래의 모니터에 있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다른 모니터에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업제안서나 비밀 편지 등을 수백m 밖에서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입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TSCM5000 보안장비(위) R5000 보안장비(아래) | ||
사실 미국 국방 정보 관련 기구들은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이 문제를 염려하는 내부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 국방부는 컴퓨터 스크린의 정보 훔치기를 방지하기 위해 ‘템피스트’(TEMPEST)라고 불리는 비밀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대응책의 첫 단계는 국방부 사무실 벽을 동과 다른 금속들로 둘러싸는 것이었다. 그뒤 휴대용 천막도 선을 보였는데 전도력이 뛰어난 천에 동과 니켈을 입혀 주파가 외부로 방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국 육군은 ‘데이터스캔 템피스트 모니터링 시스템’이란 장치를 구입했는데 이 장치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수신장치와 담뱃갑 크기의 주파 변환기 등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이 장비는 방어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공격적으로도 사용되는데 다른 컴퓨터의 정보를 빼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교승 대표는 “각종 최첨단 도청기술에 대응하는 방지책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템피스트일 것이다. 이는 전파 송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에 무선 레이저 컴퓨터 도청 방지에도 탁월한 성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뒤늦게’ 컴퓨터 화면 훔치기에 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응에 나서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지난 10월 초에야 ‘컴퓨터 전자파를 이용한 화면 훔치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컴퓨터 전자파 발생량을 줄이는 전자파 저감기술 연구 등에 내년부터 3년간 3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정통부 한 관계자는 “컴퓨터도청 방지기술 연구를 선도기반 기술과제로 지정하고 오는 12월 초 세부 연구과제를 확정, 내년부터 본격 연구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판 템피스트 프로그램은 미국에 비해 10년 이상이나 늦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