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선이 월등한 신체조건으로 정규리그 19골을 몰아치면서 득점왕에 오르자 타 구단 감독들이 불만을 품고 성별 논란을 제기했다. 일요신문 DB
10월 말 2013시즌을 마친 WK리그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비공개 간담회였다. 이 자리에는 서울시청 서정호 감독이 참석하지 않았다. 주 안건은 이번 기회에 박은선의 성 정체성을 확실하게 정리하자는 이야기였다. 참석자들 가운데 A 감독이 여자축구연맹 측에 구두로 통보했다. 이들이 내세웠던 무기는 놀랍게도 내년 시즌 WK리그 보이콧이었다.
A 감독도 이를 인정했다. 처음 기사가 보도됐던 11월 5일까지만 해도 “당시 지도자들의 기본 입장은 그간 국제 대회에서 성별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선수가 과연 WK리그에서 뛸 자격이 있는지 여부였다. 리그 보이콧도 여러 가지 대안 중 하나로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A 감독은 여론이 급격히 냉각되고, 여자축구계를 향해 지탄이 쏟아진 6일이 되자 급히 꼬리를 내렸다. 그는 한 매체와 인터뷰를 통해 “어디서 그런 이야기가 흘러 나왔는지 모르겠다. 리그 보이콧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여자연맹은 11월 6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축구회관에서 WK리그 단장 간담회를 열 계획이었다. 여기서 △신인 드래프트 △선수 선발 세칙 개정 △2013 WK리그 결과 및 2014 WK리그 운영 방안 △2014 FA컵 협의 △연고지 도입 △유스 클럽 활성화 등을 논의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추가 사안도 있었다. 어쩌면 핵심 안건일 수도 있었다. B 구단이 대표자 자격으로 “박은선의 성별을 짚어줘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만들어 각 구단 단장들의 사인을 받고 여자연맹에 공식적으로 통보하는 안이었다. 여자연맹은 단장 간담회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연맹은 서울시청과 함께 “박은선의 성별 문제를 거론하는 건 심각한 인권침해 행위”라는 기본적인 인식을 갖고 있어 당연한 결정이기도 했다.
박은선 논란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축구계에 전해져 왔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소문과 풍문들은 숱하게 나돌았지만 쉽사리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는 없었다. 언론도 축구 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박은선 문제가 올해 처음 거론된 것은 7월 동아시안컵 무렵이었다. C 구단이 여자연맹 측에 “박은선을 대표팀에 뽑지 않는 이유가 뭐냐. 이 문제를 확인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이에 여자연맹은 “여자 대표팀에 승선할지 여부는 우리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전달했고, C 구단은 다시 대한축구협회에 발송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파장은 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축구계는 쉬쉬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씨가 본격적으로 커진 건 WK리그에서 박은선이 펼쳐 보인 활약의 영향이 컸다. 정규리그에서 19골을 몰아치면서 득점왕에 오르자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지도자들은 “박은선이 뛰면 타 팀 선수들이 부상을 자주 입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었지만 진짜 이유는 만년 약체였던 서울시청의 선전 때문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아울러 앞서 C 구단이 제기했던 여자대표팀 발탁 여부는 WK리그 지도자들이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축구 또한 대표팀 선수를 뽑는 건 축구협회 기술위원회와 여자대표팀 윤덕여 감독의 고유 권한이다. 심각한 월권행위를 저질렀던 셈이다.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맨 오른쪽) 등 구단 관계자들이 지난 7일 박은선 선수 성별 논란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기가 막힌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구단들은 여론의 방향이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자 하나둘씩 발을 뺐다. C 구단의 경우는 여자연맹이 거세게 몰아치자 “이번 일은 우리 의지와 전혀 무관했다”고 발뺌하는 제스처를 취했다고 한다.
심지어 항간에서는 “일부 구단들의 경우, 박은선 문제에 대해 감독들이 비공개 간담회 자리에서 논의한 것조차 몰랐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리그 보이콧처럼 민감하고도 엄청난 문제를 구단 윗선과 교감을 나누지 않았다면 어떻게 거론이 될 수 있었을까. 봉급을 주는 사람조차 모르게 파업을 조심스레 준비할 수 있는 것일까.
축구 팬들은 모두가 박은선과 서울시청을 옹호하고 나섰다. 여론 분위기는 거의 동일했다. “좋은 성적을 내고,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선수의 인권까지 유린해도 되느냐”는 분노가 대부분이었다. “모처럼 마음을 잡고 새로운 출발을 한 박은선의 인생을 망쳐놓은 이번 일을 주도하고, 말도 안 되는 문제를 의혹으로 부풀린 이들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꾸준히 흘러나온다.
축구협회도 책임론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특히 어정쩡했던 대처는 소문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제 무대에서 박은선의 성별을 공개적으로 건드린 건 2010년 5월 여자 아시안컵을 앞두고 있던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박은선이 한국 대표로 나서면 성별 확인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축구협회는 타이밍을 놓쳤다. 좀 더 당당하고 확실히 입장을 표명했다면 지금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은선이 속한 서울시체육회는 7일 기자회견을 열고 축구협회의 책임 있는 조처와 함께 선수에 대한 인권침해와 명예훼손과 관련한 법적 조치를 묻는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성별 검사를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월드컵, 올림픽 때도 다 받았고 경기에도 출전했다. 어린 나이에도 수치심이 컸는데, 지금은 말할 수조차 없다”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계정에 올린 글에는 박은선이 느꼈을 고통이 오롯이 담겼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