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식 6일째인 지난 1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국회사진기자단 | ||
최 대표의 단식 결정은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전격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정치권은 최 대표의 단식에 대해 처음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차츰 그 파괴력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 대표는 이번 단식을 통해 정치 ‘아마추어 9단’이라는 불명예를 씻고 노무현 대통령이 조성한 재신임 정국을 반전시킬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배고픔의 고통을 딛고 그가 얻으려 했던 노림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난 11월29일은 토요일임에도 한나라당사 7층의 대표실은 전국에서 올라온 당원들로 하루 종일 북적거렸다. 전세버스가 당사 앞을 메웠고 7층 대표실에는 단식중인 최병렬 대표를 ‘알현’하려는 긴 줄이 이어졌다.
대표실 안에선 매트리스 위에 자리를 잡은 대표가 서서 지지자들을 맞고 있었다. 기력이 점점 쇠잔해져 일일이 악수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최 대표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그칠 줄 몰랐다. 지지자들은 뜨겁고 긴 박수로 대표의 단식을 ‘축하했다’. 이것으로 짧은 상견례는 끝이 났지만 대표와 지지자들 모두 웃으면서 즐겁게 헤어졌다. 이어서 또 다른 지지자들이 최 대표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몰려들고 있었다.
최 대표 단식장은 마치 ‘축제의 장’ 같다. 당직자들은 겉으로는 대표의 건강을 걱정하긴 했지만 “쓰러질 때까지 해야죠”라면서 대표의 ‘실신’을 내심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한 당직자는 단식 초기 “한 20일은 버텨야 체면을 차리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단식 정국을 더 확대시키기 위한 각종 이벤트도 준비중이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이번 단식에 대해 사전에 참모들과 의견을 나눈 적이 없었다고 한다. 특검 정국에 임하는 방법으로 단식이 논의된 적은 있지만 자신의 뜻에 따라 전격 결정됐다는 후문이다. 그만큼 최 대표 나름대로 대선자금 정국에 대한 위기감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검찰은 대선자금 수사로 당을 옥죄고 있었고 비주류측은 ‘총선 전 개헌’을 미끼로 여권과 ‘타협’을 시도해 실리를 챙겨야 한다며 최 대표를 압박하고 있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최 대표에게 “정치인생에 단식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앞으로 총선까지 무수한 정국의 가변논리가 숨어 있지만 현재로서는 최 대표의 승부수가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 대표는 ‘무기한 단식’을 끝내면 대체로 3가지 ‘포만감’을 맛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먼저 흐릿했던 대표의 당내 입지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다잡았다는 평가다. 지난 11월 중순 ‘총선 전 개헌’ 카드가 비주류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지자 최 대표는 타이밍을 내세워 그들의 ‘반란’을 잠재운 바 있다. 이 카드는 여전히 최 대표의 지위를 위협하는 비주류측에게 매력적인 카드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재오 비대위원장은 지난 11월29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총선 전 개헌’ 카드에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총선 전 개헌도 협상의 한 방법이지만 지금은 시간상으로 추진하기가 어렵다고 본다”고 밝히면서 “일부에서는 여전히 이 카드를 추진하자고 말하지만 그것은 개인 의견일 뿐 당의 방침과는 무관하다”고 못박았다.
최 대표의 단식을 통해 강경투쟁만이 당의 기본노선임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다. 또한 이번 단식 투쟁을 통해 최 대표 체제를 안착시켜 특검 국면이 끝난 뒤 공천과 당내 개혁 작업에서도 확실한 명분을 잡게 됐다고 보고 있다. 이재오 비대위원장은 “앞으로 총선 전까지 이 체제로 갈 것이다. 비대위 산하에 총선기획단을 두고 공천권까지 비대위에서 주도적으로 행사할 것이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최 대표는 또한 비주류의 ‘반란’을 잠재웠을 뿐만 아니라 당내 중진인 강재섭 김덕룡 의원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더욱 굳건한 리더십을 구축하게 됐다. 강재섭 의원은 한나라당 의총에서 최 대표의 입장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맨 먼저 조성했다. 그리고 단식장에도 가장 먼저 찾아가 이번 기회에 ‘최-강’ 구도를 당내에 확실하게 자리잡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최 대표는 ‘특검 관철’이라는 달콤한 열매도 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내에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민주당과 자민련이 일단 특검 재의결에 적극적인 의사를 보임으로써 최 대표의 쓰린 뱃속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 특검의 관철은 곧 총선 승리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최 대표를 더 고무시키고 있다. 특검이 최소한 내년 총선까지 가게 된다면 대선자금 정국을 특검 정국으로 전환시켜 계속 청와대를 압박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과정에서 최 대표는 명실상부한 정계의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부수적 이익도 얻었다. 각 당의 대표들이 줄줄이 찾아와 최 대표를 위로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상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 셈이다. 한 당직자는 “단식을 통해 거물급 지도자로 성장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반열로까지 올랐다”고 말했다. 한편 최 대표는 이번 기회에 ‘독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있게 될 물갈이와 정치개혁의 강한 추진력을 얻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나라당은 특검 재의결 물밑 협상은 그대로 진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 지구당에 단식 릴레이를 펼치는 등 오히려 투쟁강도를 높이고 있다. 재의결 협상을 관철시켜 나가되 다른 당의 협조가 미진할 경우 제2단계 방법으로 미련 없이 특검 재의결을 포기하고 대통령 측근 비리에 대한 텔레비전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대표의 건강이 결정적으로 나빠질 경우 제3단계 방법으로 정권 퇴진운동까지 전개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정가에선 한나라당의 이런 ‘장밋빛’ 평가와 투쟁 계획은 여전히 당내의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먼저 최 대표 단식이 당내 분규를 일시적으로 ‘마취’시킬 수 있는 효과를 거둘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호재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만약 야 3당이 공조해 특검 재의결을 약속한다 하더라도 투표 당일 변수에 의해 재의결이 또 다시 부결될 경우 당 지도부가 책임론 공방에 빠져 삐걱거릴 가능성이 크다. 홍사덕 총무는 청와대의 반대표 ‘공작설’을 제기했던 적도 있고 최 대표도 ‘영리한’ 노 대통령이 특검을 거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재의결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강공책에 대한 여론의 역풍이 여전히 만만치 않다. 최 대표 단식이 당내 지지자들을 한 곳으로 묶을 수는 있지만 대다수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국민들의 시각으로는 여전히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 대표의 ‘단식 정치’는 외부적으로는 여전히 ‘회색 지대’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