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 다이노스의 투수 홍성용(28).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가 SBS ESPN의 <나는 투수다>에 출연해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박찬호, 박노준 씨로부터 극찬을 받은 선수였다고 팁을 주면 홍성용이란 이름과 얼굴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LG 트윈스 입단 후 2008년까지 단 한 차례도 1군 무대를 경험하지 못했던 홍성용. 그 해 11월 방출당한 뒤 이듬해 일본 독립리그 문을 노크한 그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일본 독립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NC다이노스가 홍성용의 TV 출연 이전에 그와 접촉, 계약을 맺었을 정도로 일본 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던 그는 꿈에도 그리던 한국 프로야구로 돌아와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마산야구장에 들어섰다.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 시간을 제외하곤 숨 돌릴 틈 없이 훈련 중인 홍성용은 인터뷰 내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정말 행복하다’면서 5년 만에 다시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 생활하는 데 대한 소회를 밝혔다.
일본 독립리그에서 5년간 뛰다가 NC 다이노스에 입단한 투수 홍성용.
홍성용은 천안북일고 졸업 후 2005년 2차 5순위로 LG에 입단할 때만 해도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박병호, 최정, 한기주, 정의윤, 배영섭, 강정호 등이 포함된 21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일원이었던 그는 프로 입단 후 1군들만 가는 스프링캠프에 합류하면서 프로의 세계를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홍성용이 잠깐 맛을 본 그 ‘프로’는 겉모습일 뿐이었다. 진짜 프로가 되기 위해선 아마추어 때보다 더 혹독한 채찍질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홍성용은 자신이 밟고 있는 자리에 쉽게 만족했고, 나태해졌고, 결국엔 후회를 하게 되었다.
“바보 같았다. 스스로 밥그릇을 찬 셈이다. 프로 유니폼=성공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결국엔 스프링캠프를 마치고 시범경기 때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의 생활은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감독님이 내 주무기인 서클체인지업을 버리고 직구만 던지라고 하셨다. 그래야 스피드가 나온다면서. 서클체인지업을 던질 경우 시합에 안 내보낼 거라고까지 하셨는데, 감독님 앞에서 서클체인지업을 던질 수가 없었다. 직구만 계속 던져봤지만 130km대의 직구는 배팅볼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허송세월하며 1년을 보냈다. 구단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오라고 해서 경찰청 1기 멤버로 들어가게 됐다. 경찰청에서 2년 동안 선발로 뛰며 팔의 각도도 낮추고 사이드암으로 폼을 바꿨다. 바꾸니까 스피드가 나오기 시작하더라. 제대 후 LG로 복귀했을 때는 자신감이 상승돼 있었다. 경찰청에서 워낙 공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성용은 제대 후 다시 폼을 바꿔야 했다. 당시 투수 코치가 팔의 각도를 내린 선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을 올리면서 밸런스가 무너지는 걸 느꼈다. 마운드만 올라가면 박살나고 내려오는 게 ‘특기’였다. 홍성용은 당시 야구장으로 출근하는 길이 고행길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코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니까 발전이 없었다. 2군에서 홍성용은 야구 빼놓고 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러닝, 웨이트트레이닝, 근력운동, 하체운동 등 모든 부문에서 1위였다. 그런데 야구만 못했다. 그동안 공을 잘 던질 수 있는 힘을 키운 게 아니라 무작정 쓸 데 없는 체력 운동만 했던 셈이다.”
# 2008년 10월 8일, LG에서 방출되다
2008년 10월 8일. 홍성용은 죽을 때까지 이 날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LG에서 방출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 운영팀장님께서 호출하시더라. 순간 머리가 띵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내가?’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안고 팀장님 앞에 섰는데, 역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방출 통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영팀장님 앞에서 눈물을 쏟았던 것 같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 눈물이 흘렀다. 더 이상 야구를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일부터 내가 갈 팀이 없다는 생각에, 또 혼자 사시는 어머님한테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울고 또 울었다. 정말 쓰라린 아픔이었다.”
다음날 홍성용은 용기를 내 A 팀 스카우트 팀장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번호는 A 팀에 있는 친한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얻었다고 한다. 홍성용은 그 스카우트 팀장에게 테스트를 볼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홍성용은 거절을 당했다.
“자존심 다 버리고 기회만 주신다면 무릎 꿇고 빌 생각도 있었는데 테스트를 보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얘기하시더라. LG에서 보여준 게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때 야구와는 인연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펑펑 놀았다. 야구 용품도 다 내다 버리고 야구와 등을 지고 생활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박가람이란 선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 박가람과 함께 일본 독립리그 진출
박가람은 홍성용과 함께 LG에서 방출된 입단 동기였다. 그는 홍성용에게 일본 독립리그행을 제안했다. 월 20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일본에서 야구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홍성용으로선 한국이 아닌 일본이란 무대에 호기심이 생겼고, 자신을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두 달 동안 야구와 등져서 지낸 시간들이 야구에 대한 갈망으로 더 깊어졌던 모양이다. 가람이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 후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서 테스트를 치렀다. 일본 독립리그는 시꼬꾸리그, 간사이리그, BC리그 등이 있는데 시꼬꾸, 간사이리그에 속한 4팀에서 테스트를 치렀고, 4팀으로부터 모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캐치볼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테스트에 임했던 나로선 엄청난 결과였다. 간사이리그에서 보낸 2009년 첫 해 11승9패, 방어율 2.1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듬해 성적이 첫 해보다 더 좋았다. 12승 5패에 방어율 2.18, 삼진 150개, 180이닝을 소화하며 주니치 드래곤즈 2군이나 한신 타이거즈 2군 등과 맞붙어도 져본 적이 없었다. 정말 두려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홍성용은 2010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야구를 하지 않는 석 달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체력 훈련을 염두에 둔 아르바이트를 골랐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 산 밑으로 옮기는 강도 높은 육체 노동을 병행했다. 새벽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르바이트를 마친 후엔 오후 6시부터 밤 9시까지 웨이트트레이닝에 집중했다. 워낙 힘든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체중 감소가 현저히 눈에 띄었다.
# 한국 프로팀 입단 제의, 거절했던 속사정
2011년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면서 다시 팀에 합류한 홍성용은 공을 던질 때마다 이전과는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내 공을 상대한 선수들이 이구동성으로 ‘볼 끝이 느려지고 공이 잘 보인다’라고 말했다. 체중이 빠지면서 하체의 힘이 이전만 못했던 탓인지, 내가 봐도 공이 달라진 걸 알 수 있겠더라. 그래서 폼을 바꿔봤다. 조단이란 외국인 선수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150km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였다.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는 투구 폼을 갖고 있었고, 나도 스피드를 높이려고 그 폼을 따라하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보기도 했다. 스피드가 128km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해에 3승9패를 기록했다. 이전 해에는 내가 마운드에 오르면 일본 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나를 응원하고 격려를 해줬다. 그러나 2011년에는 내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야유를 보냈다. 야구공 잡기가 싫어지고, 마운드에 오르는 게 두려워졌다. 스피드가 나오지 않는 투수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날 처참하게 만들었다.”
야구에 대한 자신감 하락으로 갈등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홍성용은 한국의 한 프로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홍성용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전화를 건 팀 스카우트는 “앞으로 이런 기회는 없다. 이 기회 놓치면 다시 한국 마운드에 서기 어려울 것”이라며 홍성용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나도 가고 싶었다. 아니 당장이라도 일본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내 공에 대한 자신이 없는데, 한국에서 웃음거리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어렵게 거절을 했다. 아마 그 스카우트 팀장님은 그러는 날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 무라카미 감독과의 인연
홍성용은 2009년 간사이리그에서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던 무라카미 타카유키 감독이 오사카의 06BULLS창단팀 감독으로 부임 후 홍성용에게 입단 제의를 해오자, 무라카미 감독을 따라 오사카로 팀을 옮겼다(무라카미 감독은 2012한일프로야구레전드매치 때 야수들의 투구 스피드를 측정하는 ‘스피드 킹’ 행사에서 이종범을 제치고 스피드왕으로 뽑힌 바 있다). 무라카미 감독은 홍성용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홍성용에게 믿음과 신뢰를 안겨주면서 홍성용이 마운드에서 편하게 던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했다. 그 결과 홍성용은 150이닝 등판해 평균자책점 1.23을 기록했다. 챔피언전에서 MVP를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았다.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이룬 감격이었다. 팀에선 당연히 재계약을 원했다. 감독님도 내가 남아주길 바라셨다. 그때 감독님께 ‘딱 1년만 더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라고 말씀드렸다. 감독님도 흔쾌히 ‘오케이’하셨다. 그렇게 2012시즌을 맞이했는데, 시즌 중반에 한국의 SBS ESPN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나는 투수다>라는 프로그램인데, 박찬호, 박노준 선배님이 심사를 맡고, 참가 선수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투수를 뽑아 지원을 해주는 취지라고 설명해줬다. 난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찬호, 박노준 선배님 앞에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며칠 고민 끝에 방송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망설임이 더 컸다. 5년 만에 한국으로 들어가는데, 사람들 앞에서 성공한 모습이 아닌 투수로 인정받는 테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게 창피했다. 나랑 함께 운동했던 동기들이 내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손가락질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 한국의 어머니 위해 <나는 투수다>에 출연
홍성용이 TV 출연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에서 혼자 생활하시는 어머님의 존재가 크다. 2005년 LG 입단 후 단 한 번도 경기장에서 아들이 마운드에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어머님을 위해 홍성용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것이다.
“박찬호 선배님 앞에서 처음 공을 던졌을 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었던 기억이 난다. 과연 박찬호, 박노준 선배님은 내 공을 어떻게 평가하실까 하는 생각에 기대와 걱정을 안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런데 기대 이상의 호평을 해주셨다. 특히 박찬호 선배님은 ‘다른 참가자들과는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난다’면서 ‘지금 당장 프로에 가도 충분히 통할 만한 공을 가졌다’라고 극찬을 해주셨다. 방송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박찬호 선배님은 ‘홍 선수가 마음이 있다면 당장 프로팀과 연결을 해주시겠다’는 말씀도 꺼내셨다. 무조건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홍성용이 방송 촬영을 하고 있을 때 NC다이노스가 홍성용을 찾아왔다. 홍성용의 일본 독립리그 성적을 꿰뚫고 있었던 NC다이노스는 홍성용에게 테스트 기회를 제안했고, 홍성용은 어머님 손을 잡고 경남 진주로 내려가 NC다이노스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테스트를 치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공 던지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어머님을 모시고 갔던 건데, 그 자리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바로 다음날 NC다이노스와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다. NC 분들은 내가 <나는 투수다>란 방송에 출연한 지도 모르고 계셨다. NC와 계약 이후 <나는 투수다>가 방영됐고, 그 방송이 끝나자마자 프로야구 3팀에서 테스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난 이미 NC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고, 다른 3팀의 제안이 아무리 달콤했다고 해도, 내가 행한 선택에는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왜냐하면 난 이 마산야구장이 정말 좋았다. 여기 마운드가 탐이 났다. 드디어 내 집을 찾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일본에서 고생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홍성용은 NC다이노스에서 최일언 코치와의 만남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기쁨이었다고 말한다.
“최 코치 님이 첫날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넌 마운드에서 변화구와 제구력이 되니까 스피드에 신경쓰지 말고 볼 끝을 중요시해서 던져야 한다. 150을 던져도 볼 끝이 무디고 제구가 안 되면 말짱 도루묵이다. 스피드가 떨어져도 제구와 볼 끝이 좋으면 1군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으니 네 공을 믿고 자신감을 가져라’라고 말이다. 감격 그 자체였다. 2005년 프로에서 처음 만났던 어느 지도자는 나한테 스피드를 위해 서클체인지업을 포기하고 직구로만 승부하라고 지시했다. 그건 선수가 아닌 팀 성적을 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최 코치님은 선수의 장래를 위해 배려하고 연구하고 노력해주신다. 난 최 코치님을 무조건 믿고 따라간다. 스피드에 대한 부담을 덜고 제구와 볼 끝을 살리기 위해 입에 단내가 나도록 훈련 중이다. 몸은 진짜 힘들고 피곤한데, 마음은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는 중이다. 내 야구인생에서 이런 날이 올 줄은, 진짜 몰랐다.”
# 박찬호의 응원, 감동 그 자체
NC다이노스 입단 후 홍성용은 마산에서 박찬호와 조우했다. 박찬호가 김경문 감독을 만나기 위해 마산야구장을 찾은 것이다. 홍성용을 발견한 박찬호는 환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후배의 기를 살려줬다고 한다. “미스터 홍! 잘하고 있나? 프로 유니폼을 입으니까 진짜 멋있다. 앞으로 기대 많이 할 테니까 열심히 해라.”
1986년생 홍성용의 동기들은 지금 프로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스타플레이어로 자리를 잡았다. 박병호(넥센), 최정(87년생, SK), 배영섭(삼성), 정의윤(LG), 이원석(두산), 한기주(87년생, KIA) 등 면면도 화려하다. 이름값을 따지면 홍성용은 한참 뒤처진다.
“난 한 번에 체하고 싶지 않다. 이제 막 프로에 입문한 신고 선수인데, 그 딱지도 제대로 떼기 전에 1군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기들 이름을 거론하며 동등한 대우와 인정을 받고 싶지 않다. 난 일단 마무리훈련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그 다음 스프링캠프에 합류해야 한다.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시범경기 엔트리에 들어가야 하고, 시즌 개막 때 2군이 아닌 1군에서 ‘홍성용’이라고 씌어 있는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뛰는 게 지금의 목표이다. 그런 다음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
홍성용은 선배들에 대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아직 손민한 선배님은 직접 뵙질 못했다. 그러나 꼭 만나보고 싶었던 분이고 함께 생활하게 된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살 것이다. 같이 훈련 중인 박명환 선배님은 나 같은 후배랑 감히 말 섞을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눈물이 날 정도로 잘해주신다. 아니 잘 챙겨주신다. 이런 선배님들과 한 팀이 됐다는 게 꿈만 같다. 이젠 밥 먹을 걱정, 잠자리 걱정, 웨이트트레이닝장 걱정 없이 산다. 팀에 모든 게 갖춰져 있고,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난 야구만 잘하면 된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 1년 후에 떳떳한 모습으로 다시 인터뷰하고 싶다. 그때는 내 입에서 (박)병호, (최)정이, (배)영섭이 등등 친구들 이름을 편하게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