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이 고발 3년5개월 만에 삼성 이건희 회장 일가의 편법상속 의혹 수사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진은 지난 2001년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빈소를 찾은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상무. | ||
이사건은 지난 2000년 6월29일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 등 전국의 법학교수 43명이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에버랜드 이사진 등을 업무상 배임 및 특정경제범죄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곽 교수 등은 당시 고발장에서 “이건희 회장 등이 에버랜드 CB를 턱없이 낮은 가격에 발행한 뒤 장남 재용씨(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 등 네 명의 자녀에게 전량 배정해 회사와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경영권을 불법 세습했다”며 이 회장 등의 형사처벌을 주장했다.
여하튼 대검 중수부가 삼성그룹 계열사의 불법 대선자금을 파헤치고 있는 와중에 발표된 삼성에버랜드 사건 수사결과는 삼성그룹은 물론, 재벌기업 모두에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에버랜드와 같은 비상장기업의 편법 주식거래를 통한 재벌 총수 일가의 경영권 세습이 관행화된 대기업 입장에서 검찰의 이번 조치는 그룹의 핵심 인사들을 ‘잠재적 피의자’로 만든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최고의 ‘경제권력’인 삼성그룹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후계구도와 직결된 사안인 탓에 검찰 수사팀도 그동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가장 부담스러워한 부분은 혹시라도 수사결과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검찰 관계자들은 “솔직히 요즘처럼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기업은 삼성 정도밖에 없는데 굳이 이 시점에 수사 결론을 내서 파란을 일으켜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충을 토로해왔다. 만에 하나 검찰 수사로 한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고 있는 삼성의 대외신인도 등에 영향을 미쳐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게 할 경우 검찰이 고스란히 욕을 먹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나 검찰 내부의 이런 기류는 11월에 접어든 이후 조금씩 변화하는 조짐을 보여왔다. 검찰의 한 간부는 최근 취재진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적용 방침에 변화가 없다”면서도 “기소 시점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조사가 완료되면 언제든지 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해, 연내에 수사결론을 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어 서영제 서울지검장은 지난달 말 “공소시효가 아직 3년이 남은 것으로 보는데, 참여연대에서 자꾸 수사 안하느냐고 해서 법률검토를 하고 있다”고 조금 더 진전된 입장을 피력했다. 특히 서 지검장은 “검찰에는 현재 양쪽 의견이 팽팽해 미제로 남아 있는 사건이 많은데 앞으로는 우리가 최종 판단을 하지 않고 법원에 넘겨 거기서 판단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밝혀, 사실상 에버랜드 사건을 재판에 넘길 생각임을 짐작케 했다.
그는 또 그동안 시민단체와 언론 등이 ‘삼성 봐주기’ 의혹을 제기한 것을 염두에 둔 듯 “처음 부임해서 와보니 전임자들이 에버랜드 건은 수사를 안한 상태여서 (내가) 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 지검장의 말대로 검찰이 에버랜드 사건을 연내 처리하기로 방향을 튼 배경에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큰 몫을 했다.
참여연대는 지난 10월 수사팀이 이 사건 수사를 내년으로 이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송광수 검찰총장 등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내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다. 참여연대는 “검찰이 업무상 횡령 시효를 그냥 지나쳐 나중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으로 기소했다가 재판부에서 ‘배임액 산정이 어렵다’며 업무상 횡령 혐의로만 처벌이 가능하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따졌다.
실제로 서울지법은 지난 6월 SK 분식회계 사건으로 기소된 최태원 회장에 대해 비상장회사인 워커힐호텔 주식 가격을 비정상적으로 높게 산정한 뒤 SK(주) 주식과 맞교환해 부당 이득을 얻은 혐의와 관련해 “비상장 주식은 가격을 산정할 수 없다”며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한 바 있다.
또 이건희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던 법학과 교수 43명과 경실련 등 11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20일 서울지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고발장을 낸 지 3년5개월이나 지났는데 검찰은 이제와서 공소시효 문제를 들먹이고 있다”며 “연내 사건 종결을 빌미로 삼성에 면죄부를 줘서도, 공소시효가 더 남았다며 시간을 끌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별개로 최근 대검이 재벌기업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혐의를 강도 높게 수사중인 것도 에버랜드 수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대검 중수부가 SK 비자금 사건에서 시작된 대선자금 수사 범위를 삼성그룹 등 재벌기업 전반으로 확대한 마당에 더 이상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에버랜드 수사 등을 미루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검찰 수사팀 안에서도 “이번 기회에 에버랜드 건도 털고 가자”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됐고, 마침내 검찰 수뇌부도 이에 동의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검찰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사팀원들은 대부분 공소시효 논란 등을 들어 ‘연내 처리’를 주장했으나, “여론에 쫓겨 수사결론을 서둘러 내지 말고 법리적으로 논란이 있는 부분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검찰 일각의 ‘신중론’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검찰 수뇌부는 마침내 지난달 24~25일 마라톤 회의를 거쳐 최종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먼저, 월요일인 지난달 24일 오후 에버랜드 수사팀인 특수2부 채동욱 부장검사와 박용주 주임검사는 직속 상관인 신상규 서울지검 3차장 검사에게 수사상황을 총정리해 보고했다. 이날 수사팀 회의는 무려 3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출입기자들이 하나둘씩 서울지검 6층 3차장 검사실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을 훨씬 넘긴 저녁 7시가 다 돼서 방문을 열고 나온 신 차장과 채 부장, 박 검사 등은 취재진의 질문공세를 뒤로 하고, 곧바로 서영제 지검장실로 향했다.
다시 1시간 가까이 회의가 이어졌다. 서울지검 청사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 흘렀다.
이윽고 저녁 8시가 다 되서 서 지검장 등이 다소 상기된 표정을 띤 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서 지검장은 “에버랜드 사건과 관련해 뭔가 중대한 결정을 한 것 아니냐”는 취재 기자들의 질문에 “노 코멘트”라는 말만 되풀이하고는 서둘러 청사를 떠났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서 지검장은 이날 수사팀으로부터 “검토 결과 연내 기소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며, 다음날인 25일 송광수 총장에게 정기 주례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수사팀 견해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대검 수뇌부는 최종 검토를 거쳐 강금실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하는 마지막 절차를 밟았다. 결론은 “수사팀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울지검은 1일 지난 일주일간 ‘대외비’사안으로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삼성에버랜드 처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