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정부 조직은 지휘자 손짓 하나에 오케스트라가 움직이듯 박 대통령이 원하면 뭐든 바로바로 이뤄지는 체제가 갖춰졌다는 분석이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주로 이명박 정부 시절 이뤄진 숭례문 복원 사업에 대한 책임을 변 전 청장에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원전 비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세수 부족이 심각한 수준임이 드러났을 때에는 전임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라는 점을 그렇게도 강조했던 청와대 아니냐는 얘기다.
결국 변 전 청장 경질은 특정 사안에 대한 책임을 묻는 차원이 아니라 전반적인 업무 평가의 결과로 봐야 하며, 여기에는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박 대통령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문화재 비리 관련 대책 마련을 지시하자 김 실장이 이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달했고, 이정현 홍보수석이 대통령의 의지를 기자 브리핑을 통해 공개한 뒤 곧바로 변 전 청장 경질이 이뤄진 데 주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청와대가 박 대통령이 아닌 김 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 결과를 브리핑한 것 자체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고, 이후 마치 기동작전을 펼치듯 신속하게 변 전 청장 경질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번 변 전 청장 경질은 취임 후 잇단 인사 파동과 정책 논란 등으로 흔들렸던 박 대통령이 완전한 국정 장악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 청와대 지휘 하에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무섭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서 “지휘자의 손짓 하나에 오케스트라가 움직이듯이 이제는 박 대통령이 사인을 내리면 일사불란하게 집행이 이뤄지는 시스템이 갖춰진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박 대통령이 원하면 뭐든 바로바로 이뤄지는 체제가 갖춰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진행된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하면 이 같은 진단을 과도한 음모론, 피해의식 정도로 치부하기 어려울 것 같다. 박 대통령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단적인 사례는 ‘인적 청산’이다. 양건 전 감사원장으로 시작해 채동욱 전 검찰총장, 이석채 전 KT 회장 등 현 정부에 눈엣가시로 여겨졌던 인사들이 속속 옷을 벗었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도 사의를 표명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채 전 총장은 ‘혼외자 논란’이라는,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사유로 낙마했고 꿋꿋이 버틸 것 같던 이석채 전 회장은 검찰 수사 앞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야당에서 ‘찍어내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왼쪽부터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 양건 전 감사원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 이석채 전 KT 회장.
전교조 및 전공노 조합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는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 등의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지난해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다는 증거들이 쌓여가는 와중에 시작됐다. 한편에서는 “군사독재 정권도 시도하지 않았던 무리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이를 뒤집어 보면 그만큼 현 정부가 일사불란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정부가 대대적인 공공기관 개혁 작업에 착수한 것도 또 다른 일사불란함의 증거다. 지난 18일 박 대통령이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공기업 비리를 언급하며 엄단 및 개혁 방침을 밝히자마자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실행계획을 내놓은 것이다. 시발점은 공공기관이지만 결국 공직 사회에 대한 고강도 사정과 감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감사원이 황찬현 원장 체제로 안정을 찾을 경우 이 같은 작업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집권 초반 잇단 ‘인사 참사’와 인사 지연, 미숙한 현안 대응 등으로 인해 “준비된 대통령이 맞느냐”는 비판을 받았던 박 대통령이 이처럼 국정 장악력을 높이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김기춘 역할론’을 꼽는 이들이 많다. ‘박근혜 청와대’가 지난 8월 5일 김 실장의 입성 전과 후로 뚜렷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고령에 검찰총장, 법무장관 등 풍부한 경험을 갖춘 김 실장이 집권 초반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청와대 비서실을 ‘일을 할 수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얘기다. 최근 사례를 통해 확인되듯 김 실장의 역할은 단지 청와대 비서실을 탈바꿈시킨 데 그친 게 아니라 정부 조직이 컨트롤타워인 청와대의 기획과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이처럼 완벽한 국정 장악을 통해 경제 회복과 개혁 등 본격적인 국정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찮다. 청와대와 정부가 짜임새 있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긍정적 신호이지만 야권과 시민단체 등에서 ‘독재’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통치의 과잉’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민심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국정드라이브는 자칫 현 정부를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