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계약 이후 공식 기자회견 외엔 개별 인터뷰에 나서지 않았던 정근우와 제주도에서 돌아온 29일 오후,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게장 비빔밥을 앞에 두고 시작된 인터뷰는 그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고, 흥미로웠으며, 담백했다.
정근우와의 인터뷰는 2회로 나눠 게재한다. 1회는 ‘정근우, FA에 대해 입을 열다’이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입단식을 마치자마자 제주로 내려가 김성근 감독을 만났다. 한화와의 FA 계약 후엔 김응용 감독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제주도를 찾은 적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전․현직 감독을 모두 제주도에서 만난 셈이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모양새가 그렇게 됐다. 김성근 감독님이 SK 감독님이셨을 때는 ‘감히’ 말도 못 꺼냈던 선수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평소 종종 전화드리곤 했었다. 가끔 술 마시고 새벽 두세 시에 감독님께 전화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안 받으셨다가 다음날 아침에 ‘또 술쳐먹었냐’라며 야단치는 문자를 보내신다. 운동할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운동량으로 힘든 날이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김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해주셨다. 무엇보다 우승이라는 값진 결과로 보람을 선물해주신 게 가장 큰 대가가 아니겠나.
―한때 김성근 감독의 제자였다가 지금은 김응용 감독의 제자가 됐다. 이에 대해 김성근 감독이 어떤 얘기를 해줬는지 궁금하다.
▲김응용 감독님이 많이 (마음이)약해지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선수 입단식에 참석해서 꽃다발을 건네주고, 계약하라고 전화하실 분이 아니라면서(웃음). 밖에서 보기엔 엄하고 무서워 보였지만, 이번에 직접 만나보니까 의외로 따뜻하고 정감있는 분이셨다. 하긴 내가 김성근 감독님과 텄는데, 김응용 감독님을 어려워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웃음).
―FA 얘기를 해보자. 일단 생애 첫 FA 계약을 치른 소감이 어떤가.
▲FA를 앞두고 행복할 줄로만 알았다. 행복한 고민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더라.
―어느 선수보다 말이 많았던 FA 계약이었다. 굳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미스터리’로 포장돼 돌아다닌 소문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텐데.
▲참, 이게 그렇다. 선수 입장에선 한솥밥을 먹었던 팀을 상대로 마음 속에 담아둔 얘기를 꺼낸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계약 직후 배신감을 느낀 SK팬들의 강도 높은 비난에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솔직히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SK와의 협상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11월 16일 원소속팀과의 협상이 끝날 때까지 모두 5차례 만남을 가졌다. 9년 동안 SK 선수로 뛰면서 1번타자 ‘정근우’를 있게 해준 팀이기에 꼭 남고 싶었다. 원래는 지난 10월 정규리그 종료되자마자 바로 계약을 진행하자고 말씀드렸다. 이미 구단에서 시즌 중에 계약 얘기를 꺼냈기 때문에 시즌 마치고 바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정작 시즌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으로부터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러다 11월 11일 처음 만남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단에선 계속 나한테 액수를 말하라고 하고, 난 구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하고….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다가 처음으로 숫자를 제시 받은 게 16일, 마지막 협상하는 자리에서였다. 70억 원이었다.”
―그런데 왜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았나.
▲구단에선 내가 80억 원을 달라고 했다고 발표했는데, 그 액수가 나오게 된 과정이 재미있다.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보자. 내가 만약 80억 원을 받고 싶었던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한화와 70억 원에 계약을 할 수 있었겠나.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올려달라고 요구했을 지도 모른다. 왜? SK에서 제시한 70억 원이란 숫자 때문이다. 마지막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데에는 그동안 쌓인 불편한 감정들 때문이다. 밝히기 어려운 얘기들이 오고가면서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이게 뭐지?’ 하는 심정으로 다섯 차례의 협상에 임했었다. 난 진심으로 구단의 진정성을 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날 원한다는 진정성 말이다.
―SK와 마지막 협상이 결렬되고, 다음날 이른 오전에 한화와 계약을 맺었다. FA 시장에 나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고 싶다고 말한 사람으로서 다소 빠른 결정이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래서 사전접촉설이 나왔던 것이고.
▲SK 구단 관계자분과 마지막 협상을 가지면서 서로 의견 차이를 확인한 후에 ‘그렇다면 시장에 나가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알아보겠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헤어질 때는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돌아섰다. 그 시간이 9시였다. 어차피 1주일 후면 다시 SK와 협상을 해야 하고, 원소속팀과의 협상 종료 마감 시한도 3시간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좀 더 고민하고 싶었다. 그런데 구단에선 나랑 헤어진 지 5분 만에 ‘정근우 협상 결렬, 선수는 80억 요구, 구단은 70억 제시’라는 발표를 해버렸다. 순간 또 ‘이게 뭐지?’ 싶었다. 마치 나랑 협상이 끝나길 바랐던 것 마냥, 헤어진 지 5분 만에 발표를 하는 의도를 모르겠더라. 나가라고 등 떠미는 듯한 느낌을 줬다. 그래서 바로 구단 관계자 분께 전화를 드렸다. 집에 와서 보니 이런 기사가 떴는데, 아직 (협상 마감)시간도 남아있으니 기사를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70억 원이란 얘기는 마지막에 처음 들었던 액수이고, 거기에 사인할지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인데 이렇게 기사를 내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고도 물었다. 그리고 ‘내려주십시오’라고 거듭 부탁했다. 하지만 내 전화를 받으신 분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더라.
―협상 과정에서 거론됐던 액수가 공개되면서 파장이 더 커진 부분은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기사를 보고, 또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아내와 많이 울었다. 팀의 진정성을 느끼고 싶었던 내 마음이 돈의 액수 갖고 장난치는 배은망덕한 놈으로 변모해 있었다. 돈? 중요하다. 하지만, 난 SK에 남고 싶었다. FA 앞두고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지만, 난 다른 유니폼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전 접촉설? 뭐가 사전 접촉인가? 한화와는 17일 새벽에 만난 게 처음이었다.
―왜 굳이 이른 오전에 한화와 계약을 해야 했나.
▲16일 자정이 넘어가니까 바로 한화에서 전화를 해오더라. 집 앞이라고 했다. 내려가서 한화 관계자 분을 만나 차분히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울컥해지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진정성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데 대해 이해를 구한다. 언젠가 이 모든 걸 속 시원히 말씀 드릴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머리를 쓰는 놈이었다면 발표 시점을 조절하거나 액수를 더 올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내 감정에 충실했다. 한화가 보여준 진정성에 바로 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었다.
―이만수 감독과는 통화를 했나.
▲당연히 전화를 드렸다. 죄송하다고 말씀 드렸더니 감독님도 상당히 안타까워 하셨다. 올시즌 주장을 맡았는데 팀 성적이 6위까지 내려갔다. 그에 대해 책임도 느끼고, 감독님께 면목도 없었는데 팀까지 떠나게 돼서 정말 드릴 말씀이 없었다. 감독님 입장에선 당연히 내가 남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그래도 나중엔 격려해주시면서, 다른 팀에서도 열심히 잘하라고 덕담을 건네셨다. 많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팬 카페 ‘대찬인생’에 직접 올린 글을 읽었다. 한화로 가게 된 데 대한 복잡다단한 마음이 담겨 있더라.
▲2006년부터 시작된 팬카페 ‘대찬인생’은 해마다 모임을 가지며 친목을 도모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이다. FA 이후에도 SK에 남을 거라는 생각에 시즌 마치고 10월 중순께 팬카페 회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그동안 고마웠다.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달라’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냈으니 그 미안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FA 계약 이후 팬 카페 주인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 진심을 전했다. 그때 카페 주인장이 나한테 해준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린 정근우를 좋아했던 거지, SK 정근우만을 좋아했던 게 아니다. 앞으로 팬카페는 그대로 운영될 것이다. 이제 더 많은 팬들이 늘어나지 않겠나. 한화 팬들이 가입할 테니까. 한화 정근우도 열심히 응원할 것이다’라는 말에 또 감정이 복받치고 말았다. ‘대찬인생’ 카페 회원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정근우 인터뷰 2편이 이어집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