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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L기 폭파사건 이후 서울에 호송된 범인 김현 희. 최근 희생자 유가족들은 ‘수지 김 사건’과 같이 당국이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김현 희는 들러리였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
최근 유가족들이 858기 사건의 사법 처리과정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된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올 초 수지 김 사건의 안기부 조작사실이 드러난 데다 지난 3월 검찰 등에 요청한 사건 수사 및 재판 기록 공개 요구가 거부됐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수지 김 사건과 858기 폭파사건은 같은 87년에 일어났다.
유가족들은 “당국의 조작 사실을 법원이 간과했거나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당시 사법부의 심리 근거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유가족들이 ‘공인’인 이 후보에게 ‘진상을 밝혀달라’는 공개요청을 할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후보로서도 어떤 형식으로든 입장 표명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유가족들이 의혹의 근거로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최근 입수한 858기 사건의 법원 판결문과 김현희의 공범으로 지목됐던 ‘폭파범’ 김승일의 검시보고서. 유가족들은 “판결문과 검시보고서의 내용이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문과 차이가 있다”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먼저 시침을 당시로 되돌려보자.
KAL기 폭파범으로 기소됐던 김현희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것은 1990년 3월27일. 당시 김씨는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이날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다수의 승객, 승무원이 탑승해 운항중인 국제민간항공기를 폭파시킨 극단의 비윤리적인 행위로서… 원심의 사형선고는 지나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원심의 사형선고를 확정했다.
재판관석에 앉은 대법관은 모두 4명. 주심판사 김주한 대법관을 비롯해 배석, 김상원 그리고 이회창 대법관이 현장에 있었다.
재판부는 “김 피고인이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되면서 남조선해방을 위해 투쟁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는 사실 등에 미루어보면 원심이 피고인의 사건범행을 강요된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옳다”며 “죽은 북한공작원 김승일과 함께 범행지로의 침투와 귀환 방법, 폭파 방법 등을 의논하고… 범행실행을 분담했으므로 공동정범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판 당시는 특별사면 형식으로 김현희씨를 구명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이미 알려져 있던 상황.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재판정에 있던 희생자 가족 30여 명의 절규가 터져나왔다.
“특별사면은 있을 수 없다. 김현희를 극형에 처하라.”
김씨의 변호를 맡은 안동일·정재헌 변호사 등은 판결에 대해 “김 피고인이 모든 사실관계를 시인하고 있으므로 재심을 청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씨는 같은 해 4월12일,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02년 현재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당국의 조작의혹을 제기한 유가족들은 거꾸로 ‘김현희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사건의 진상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김현희는 조작을 위해 등장시킨 가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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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7년 KAL 858기 폭파 당시 대한항공 빌딩 앞에서 울부짖고 있는 희생자 유가족들. 88보도사진연감 | ||
유가족들은 지난해 12월8일 국정원 관계자들과의 비공개 만남에서 ‘김현희의 아버지 신원이 확인됐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김씨의 실체를 파악할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국정원 관계자는 ‘아직 확인중에 있다’는 얘기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유가족들은 15년이 다 되도록 진상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까닭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있다. 이 같은 의혹의 시선은 당시 수사당국뿐만 아니라 사법부에도 고스란히 옮겨가고 있다. 최근 유가족들이 법원 판결문과 검시보고서 등을 토대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부분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다.
▲김현희가 북한공작원이라는 근거가 왜 빠졌나
안기부는 88년 1월15일 수사 발표에서 “김현희는 1972년 11월2일 남북조절위 2차 회담 때 우리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던 장본인”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내용은 안기부가 김현희씨를 북한공작원이라고 밝히는 유력한 근거가 됐다. 하지만 그 증거로 제시된 사진 속 화동의 귀 모양은 김씨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이어서 국내외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5개월 뒤에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는 이같은 모순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깨물었다는 독약 앰플이 온전한 증거물로 제출된 까닭은?
안기부는 ‘김씨가 폭파 공작을 한 후 도주하다가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되자 액화 청산가리 독약 앰플을 깨물었다’고 밝혔다. 같은 수사 발표문에 따르면 김씨가 소지한 독약 앰플은 1개. 하지만 김씨가 깨물었다는 독약 앰플은 외부 손상이 전혀 없는 상태로 법원에 증거물로 제출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 아무런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김현희의 경유지가 왜 바뀌었나
안기부의 수사 발표와 판결문의 내용이 어긋나는 부분이다. 김씨는 폭파 공작에 앞서 평양을 떠나 유럽의 여러 곳을 거치게 된다. 그 중 한 곳이 오스트리아의 빈. 안기부는 김씨가 빈의 남역(南驛)에 내린 뒤 암파클링호텔 603호에 묵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의 프리랜서 취재기자들은 안기부 수사발표가 있은 뒤 김씨의 행적을 그대로 추적했다. 그리고 김씨가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곳은 남역이 아닌 서역(西驛)이었음을 밝혀냈다. 암파클링호텔에는 603호가 없으며 실제로는 322호에 묵었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그러자 판결문에서는 안기부 수사 발표를 뒤집고 그대로 일본의 보도를 따라 서역으로 적었다. 김씨가 묵었다던 객실 호수는 아예 누락됐고 안기부의 잘못된 발표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혀 없었다.
▲김현희가 북한에서 받았다는 상훈은 왜 바뀌었나
법원 판결문 내용이 안기부 수사 발표와 어긋나는 부분은 또 있다.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1985년 8월15일에 북한에서 ‘조국해방 40돌 기념공로메달’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에는 기념공로메달은 없고 기념메달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법원은 아무런 지적도 없이 이를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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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가족들은 안기부의 발표와 사법부의 판결문 내용이 차 이가 있다며 당시 대법관이었던 이회창 후보에게 정확한 진상을 밝혀줄 것을 공개요청할 예정이다. | ||
대법관으로 858기 사건을 심리했던 이회창 후보측의 이종구 언론특보는 “당시 재판부가 유가족들의 주장처럼 엉성하게 심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유가족들의 주장은 사안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이 특보는 또 “꼭 답변해야 할 내용이 아닌 것 같다”며 “의혹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것 같지만 이 사안을 이 후보께 보고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대법원 주심판사를 맡았던 김주한 변호사도 “오래 된 사건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 대법관으로서 형을 최종 확정했던 이 후보와 김 변호사의 판결은 사실심(事實審)이 아닌 법률심(法律審)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유가족측이 제기한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의 부장판사로서 858기 사건 2심 재판을 맡았던 이일영 변호사도 “사건과 관련해 이상한 점은 전혀 없었다”며 “사실 관계를 다투는 것은 항고심 심리 범위 밖”이라고 말했다.
법정에 제출된 증거물의 증거능력과 사실여부를 심리했던 당시 1심 재판 관계자들 역시 유가족들의 의혹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당시 1심 재판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오래 전 일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당시 법원이 이미 조작설이 제기됐던 사건을 심리하면서 안기부 발표와 증거물의 차이 등과 같은 모순을 간과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검찰이 858기 사건 관련 기록에 대한 ‘비공개’ 결정을 내린 표면적인 이유는 이랬다. ‘안보 통일 외교 관계 등에서 공공의 안정과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고 특정인을 식별할 수 있는 개인정보가 담겨 있다’는 것.
유가족들은 이제 검찰에 거꾸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억울하게 희생된 1백15명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개인 정보를 보호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냐”고.
과연 유가족들의 주장대로 858기 사건의 또다른 진상이 15년 동안 숨겨져 온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누군가는 이 의문에 답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