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찍어내기’에 현 정부가 관여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 가운데, 그동안 거론되지 않았던 여권 핵심 실세가 개입한 정황이 포착됐다. 사진은 채동욱 전 총장 퇴임식. 사진공동취재단
조오영 행정관이 채 전 총장 혼외자식으로 지목된 채 군의 가족관계등록부를 조이제 서초구청 국장에게 요청한 것은 지난 6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행정관은 김 아무개 안전행정부 국장이 주민등록번호를 주며 채 군 가족부 열람을 부탁해와 서울시청에서 같이 근무했던 조 국장을 통해 알아본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조 행정관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다 조 국장이 “조 행정관과 문자를 여섯 차례 주고받았다”고 실토하자 뒤늦게 인정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12월 4일 조 행정관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직위해제한 뒤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김 국장이 조 행정관에게 채 군 인적사항을 요청했다는 내용은 청와대 자체 진상조사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이에 대해 김 국장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김 국장은 “12월 4일 청와대로 들어가 조사를 받은 것은 맞지만 조 행정관과 통화한 것은 안부 차원에서였다. 조 행정관 부인과 한 마을 사람으로 인연을 맺어 가끔 통화하곤 했던 게 전부”라면서 “채 군 정보를 물어본 적이 없다. 검찰 수사에서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발표를 중앙부처 공무원이 정면 반박한 것으로 상당히 이례적이라는 평이다. 이는 또한 청와대 해명이 부실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는 채 군 가족부 불법 열람 의혹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인 12월 2일 감찰에 착수했고, 이틀 뒤인 4일 그 결과를 발표했다. 처음엔 조 행정관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청와대는 그를 직위해제하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그만큼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얘기다. 조기에 진화할 필요성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채동욱 찍어내기’에 현직 행정관이 연루됐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지난해 대선 국가기관의 개입 의혹과 맞물려 박근혜 정부 정통성이 흔들릴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채 전 총장은 국정원 댓글 수사와 관련해 현 정부와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청와대의 ‘꼬리 자르기’라는 비난 여론만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일탈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점들이 한두 군데가 아닌 까닭에서다. 우선 김 국장이 조 행정관에게 채 군 가족부 열람을 요청한 시기는 6월 초다. 채 군이 채 전 총장 혼외자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때는 그보다 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관련 내용이 최초 보도된 9월 6일보다 최소 3개월 전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채 전 총장 혼외자식 의혹은 사정당국 주변에서 ‘일급비밀’로 통했던 고급 정보였다. 그것조차 ‘채 전 총장 혼외자식이 있을 것’이라는 카더라 수준이었지 이처럼 채 군을 가리키진 않았었다는 점에서 중앙부처 국장이나 청와대 행정관이 이를 어떻게 접했는지가 의문이다. 김 국장이 채 군 주민번호를 알게 된 것 역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이들의 ‘몸통’과 연결되는 것으로 향후 검찰 수사에서 반드시 밝혀져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채 군 가족부 불법 열람과 관련해 정치권에선 여러 시나리오가 제기되고 있다. 우선 이명박(MB) 정부 실세 그룹이었던 ‘영포라인(경북 영일·포항 출신)’과 ‘S라인(서울시청 출신)’이 검찰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 수사를 막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이다. 김 국장(경북 영천), 조 행정관(경북 안동), 조 국장(포항) 모두 영포라인에 속한다. 이 중 서울시청 출신인 조 행정관과 조 국장은 원세훈 전 원장이 서울시에 재직할 당시 측근으로 통했다고 한다.
조 행정관이 채 군 가족부를 전달받은 6월 11일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채 전 총장이 원 전 원장 기소를 놓고 마찰을 빚을 때였다. 당시 검찰 주변에선 국정원 내 ‘원세훈 잔존 세력’이 댓글 수사를 밀어붙이던 채 전 총장을 흠집 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이것이 혼외자식 의혹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선 국정원 개입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채 전 총장 혼외자식 보도가 나간 후에도 국정원은 그 배후로 오르내린 바 있다. 이는 현 정부 들어 국정원과 검찰 관계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에서 비롯된다. 국정원은 댓글 사건으로 인해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채 전 총장은 국정원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했을 것이라고 판단한 특별수사팀에 힘을 실어주다 ‘괘씸죄’로 물러났다는 게 정설이다. 국정원 입장에서도 채 전 총장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터.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채 전 총장이 물러나는 과정을 보면 상당히 잘 짜인 각본 같다. 이 정도를 실행할 수 있는 기관은 국정원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이번에도 채 군 가족부 불법 열람 논란이 커지자 기다렸다는 듯 국정원이 장성택 실각설을 공개한 것은 너무나도 기가 막히다. 국정원이 ‘물타기’를 했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채 전 총장 사퇴에 관련이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일했던 한 야당 의원은 “행정관이 직속상관 모르게 그러한 일을 했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설령 행정관이 독단적으로 한 것이라 하더라도 감찰에선 직속상관인 이재만 비서관을 조사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채 전 총장 낙마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곽상도 전 민정수석과 김 국장이 성균관대 동문이라는 것도 청와대 기획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곽 전 수석은 “난 (김 국장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일축했다.
이런 가운데 <일요신문>은 그동안 전혀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던 여권 핵심 인사 A 씨가 채 전 총장 혼외자식 논란에 개입한 정황들을 포착했다. A 씨는 정치권 전면에서 활동하진 않지만 여권 막후 실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박 대통령 측근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과도 가까울 뿐 아니라 새누리당 중진급 의원들과도 막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대선 때는 외곽에서 박 대통령을 지원했다고 한다.
한 사정기관 고위 인사는 “A 씨가 지난해 조 행정관과 사적인 모임에서 만나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MB맨’이라고 할 수 있는 조 행정관이 현 정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A 씨 때문이라고 들었다”면서 “A 씨가 채 전 총장 혼외자식과 관련해 알아보고 다녔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A 씨가 채 군 가족부 열람을 직접적으로 지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채 전 총장 사퇴를 위해 비선에서 (채 군 가족부를 가지고) 움직인 것은 팩트(사실)”라고 전했다.
A 씨가 채 전 총장 낙마에 관여한 게 사실이라면 이는 현 정부의 ‘채동욱 찍어내기’ 역시 설득력이 높아진다. 사실 채 전 총장 혼외자식 건은 공직기강을 감찰하는 민정수석실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확인하면 되는 사안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한 관계자는 “고위 공무원 개인사와 관련된 의혹이 접수되면 관련 기관에서 파견 나온 공무원을 통해 체크를 한다. 이를 방치한다면 오히려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며 “채 전 총장 혼외자식 역시 그런 루트를 거쳤다면 지금처럼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무비서관실에서 시설을 담당하는 조 행정관은 채 군 가족부를 열람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김 국장이나 A 씨 역시 마찬가지다. 채 전 총장 혼외자식 여부에 대한 검증이 ‘비선’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이는 채 군 가족부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려 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앞서의 사정기관 고위 인사는 “채 전 총장에게 혼외자식이 있다면 고위 공직자로서 자격 상실이다. 정권 입장에서는 별 탈 없이 채 전 총장을 물러나게 할 수도 있다. 채동욱 찍어내기와 같은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그런데 이를 A 씨 등 특정 세력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을 해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채 군 가족부를 가지고 어떤 효과를 노렸는지는 차차 밝혀질 것”이라고 전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