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씨는 세상을 떠난 막내딸을 기리기 위해 ‘이진아 기념 도서관’을 지었다. 작은 사진은 1층 입구에 있는 진아 양의 생전 모습이 담긴 동판.
“따님이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문득 2주 전 회사 출장 차 미국으로 건너 가 딸을 만나고 온 생각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봐서 반가웠던 막내딸은 “아빠, 하루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라고 애교를 피우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막내 딸의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그것이 막내딸의 마지막 부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2003년 6월 2일. 막내 딸 이진아 양은 끝내 세상과 이별을 하고 말았다. 23세의 꽃다운 나이.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동시통역사가 돼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겠다”는 딸의 당찬 꿈도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아버지의 마음속에 가슴 아프게 남고 말았다.
아버지 이상철 씨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자신이 가꾼 의류수출업체 현진어패럴을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의 이름을 각각 한 글자씩 따서 ‘현진’이라는 회사 이름을 지을 만큼 ‘딸바보’이기도 했다. 이상철 씨는 딸을 기리기 위한 여러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평소 책을 좋아했던 딸을 위해 도서관을 짓기로 결심했다.
이상철 씨가 50억 원을 기부해 건립이 추진된 도서관은 2005년 9월 15일, 이진아 양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에 맞춰 개관됐다. 이상철 씨는 “진아 또래의 학생들이 언제든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 명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더불어 이곳이 진아 양의 ‘추모공간’이 아닌 사회를 위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에 남아 있는 진아 양의 흔적은 도서관의 이름과 1층 입구에 있는 진아 양의 생전 모습이 담긴 동판 정도로 최소화했다.
도서관 내 인문학 강의 모습.
개인의 이름을 달고 기부를 통해 지어진 도서관은 ‘이진아 기념 도서관’이 국내 최초다. 때문에 장서의 확보나 프로그램의 기획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우선 지역주민에게 밀착해 친화를 도모하는 활동부터 시작했다. 강의를 하더라도 지역 주민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한 지역주민은 도서관에서 동화구연 활동을 하다 정말 동화구연가가 된 사례도 있었다. 책을 기증받기 위한 지역 바자회, 독립공원에서 여는 북 페스티벌도 이진아 기념 도서관의 활동 중 하나였다.
여러 노력에 힘입어 도서관의 장서 수는 초기 3만 권에서 현재 8만여 권으로 늘어났고 올해 11월까지 총 51만 명이 이용한 서대문구의 대표적인 도서관으로 자리 잡았다. 주말이 되면 빽빽이 들어오는 차들로 근처 버스기사로부터 항의를 받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종종 있다고 한다.
입소문을 타고 역량이 인정되다 보니 상복도 터졌다. 2009년 국무총리상,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에 이어 지난해에는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에서 실시하는 전국 도서관 운영평가에서 3년 연속 우수도서관으로 선정된 것은 물론이다. 구립도서관으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기에 이진아 기념 도서관의 성과는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부정이 가득 담긴 이진아 기념 도서관은 그렇게 세상 속으로 쭉쭉 뻗어가고 있다. 이정수 관장은 “내년에는 이진아 기념 도서관과 연계된 작은 도서관을 11개까지 늘릴 예정이다. 인문학 강좌나 은퇴자를 위한 프로그램도 향후 기획할 생각이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