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운영이 어려운 현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승부수를 던질 듯하다. 사진은 지난 5일 2003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해 연설하는 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집권 1년차에 원내 과반수 이상 의석을 가진 ‘공룡야당’의 반대와 사상 유례 없는 여당의 분열을 겪은 노 대통령에게 내년 총선은 남은 4년 임기를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을지를 가리는 절체절명의 분수령이 될 것이 확실하다. 이미 재신임을 자청할 정도로 정권의 위기를 절감한 노 대통령으로서는 총선 승리에 말 그대로 목을 맬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 하겠다.
그러나 정국상황은 노 대통령의 뜻과는 무관하게 갈수록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특히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법안은 3야 공조로 국회 재적의원 3분의2(1백82석)보다 무려 27명이나 많은 2백9명의 의원이 재의결 찬성표를 던져 대통령의 권위를 무참하게 짓밟아버렸다.
망신도 망신이지만 내년 4월 총선 직전까지 청와대 측근 3인방인 최도술(전 총무비서관)-이광재(전 국정상황실장)-양길승씨(전 제1부속실장)에 대한 특검수사가 진행되면, 노 대통령으로선 하루 하루 지뢰밭을 걷는 기분으로 국정을 운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정신적 여당’을 자처하는 열린우리당의 무기력도 노 대통령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요인이다. 분당을 불사하며 새 살림을 차렸건만 전혀 신당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당권을 놓고 중진-소장파 간 권력투쟁만 가열되고 있기 때문. 특히 정당 지지도 ‘만년 3위’의 꼬리표를 언제쯤 뗄는지 지금 상황으로선 가늠도 안 되는 처지다.
노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내우외환’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노 대통령을 만난 한 시니어급 측근은 “노 대통령은 지금의 상황으론 도저히 국정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측근비리 법안이 ‘어처구니 없는’ 숫자로 재의결된 것과 이 과정에서 우리당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모습에 뭔가 단단히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껏 노 대통령을 만나온 경험에 비춰 곧 특단의 결단이 임박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 여권 핵심부는 최근 3야 주도의 특검 정국에서 청와대와 우리당의 정치적 무기력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민주당과의 관계설정과 우리당이 검증되지 않은 외부인사들을 무분별하게 영입하면서 결과적으로 호남 민심을 악화시킨 점, 청와대-우리당 간 의사소통의 문제점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솔직히 지금 여권의 구조와 진용으로는 내년 총선에서 낭패를 볼 것이란 우려감이 내부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 특히 정무라인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우리당도 전략적 판단 없이 우왕좌왕해 결과적으로 대통령을 힘있게 뒷받침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 대통령도 사정은 꿰뚫고 있으며, 인적쇄신 등 여러 카드를 어느 시점에 어떻게 조합해야 가장 효과적일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지난 4일 특검법 재의결 투표결과를 심각하게 지켜보는 열린우리당 정대철(왼쪽) 김원기(오른쪽)의원.이종현 기자 | ||
관심의 대상은 총선과 재신임 카드의 연계 여부다.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은 “우리당의 지지도 상승 등 상황이 어느 정도 개선되면 노 대통령은 적절한 시점에 총선결과에 재신임을 걸겠다고 전격발표할 가능성이 높다. ‘여당에 안정적 의석을 주지 않으면 이제까지 봐왔듯 국정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총선결과와 자신의 진퇴 문제를 연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국민투표는 위헌 시비가 있으니까 재신임의 기준을 ‘원내 제1당’ 정도로 설정해 할 수는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노 대통령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야무야 넘기는 정치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며 재신임 철회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 ‘비장의 카드’로 계속 남겨둘 뜻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당 김원기 상임의장이 노 대통령이 재신임 문제를 자신에게 위임했음을 주장한 이후 사실상 ‘버리는 카드’로 여겨졌던 것과 분명 다른 기류라 하겠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올인’(All in)에 가까운 승부수를 두리라 예단하기는 이르다. 정국 변수가 워낙 많고 우리당이 지금과 같은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민주당과의 재통합 문제 등도 걸려 있기 때문. 특히 우리당이 내년 1월11일 전당대회 때까지 정국 주도권 장악, 정당 지지도 제고 등에서 별반 진전이 없을 경우엔 노 대통령이 입당을 총선 이후로 미룰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이 우리당 입당은 기정사실화하면서도 “정치적 공방 가운데 가장 데미지가 적고, 전략적으로 효과가 좋은 시점에 입당하겠다”며 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연말 단행될 개각을 장관 3∼4명 교체하는 ‘소폭’으로 잡은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야당은 물론 우리당까지 ‘국정쇄신’과 ‘총선 징발령’을 내세워 청와대·내각의 대폭 물갈이 인사를 요구했음에도 노 대통령은 “쇄신인사를 하지 않겠다”며 이를 ‘외면’했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우리당의 총선 임전태세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을 경우 ‘올인’으로 해석될 ‘총동원령’을 내릴 수는 없는 처지다. 한 관계자는 “우리당에 대한 노 대통령의 걱정과 실망이 크며 경우에 따라서는 입당 시기가 한참 미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 조순형 민주당 대표 | ||
반면 우리당으론 도저히 총선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민주당과의 재통합이나 총선 후 무소속 당선자들의 대대적인 영입·연대가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한 노 대통령의 한 핵심측근은 “지금으로선 민주당과의 재통합이 난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양당의 수도권 의원들이 적극 나서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내년 1월 말까지가 시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당이 지지부진하고 민주당과의 재통합도 물 건너간다면 노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무소속 의원들의 영입 또는 연대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내년 총선엔 영남에서 반(反)한나라-비(非)우리당, 호남권에서 반(反)민주-비(非)우리당 정서가 확산돼 무소속이 약진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전망했다.
‘재통합 카드’에 대해선 청와대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학진 전 청와대 정무1비서관은 “최근 만난 청와대 고위인사가 ‘우리당과 민주당이 재통합하지 않으면 공멸할 것이며, 내년 1월 중이나 늦어도 2월 초에는 극적인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혀 주목을 끈 바 있다. 노 대통령이 ‘시계 제로(0)’ 상태인 향후 정국에서 과연 어떤 카드를 내밀지 정치권의 이목은 온통 청와대로 쏠리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