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재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는 민족의 스승을 ‘무국적’ 상태로 방치한 데 대해 개탄했다. | ||
남편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 이씨는 “성묘는 물론이고 남편 입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도 듣지 못했다”며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 쉬쉬하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이씨는 한때 남편이 간첩이 아닌가 의심까지 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72년 남편과 함께 아버님 성묘를 갔는데 풀이 사람키만큼 자라있었던 것. 무덤 주위에는 소 배설물이 쌓여 있어 묘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알고보니 남편은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던 요주의 인물. 단재 선생이 발표했던 의혈단 선언문이 당시 대학가 운동권의 교과서처럼 사용되면서 특별 사찰을 받고 있었던 것. 덕분에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성묘를 가야 했다. 한때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산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서글픈 점은 시아버지의 호적이 없어 남편이 사생아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이씨는 “남편은 사망하기 5년 전까지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로 살아야 했다”며 “86년 법적 소송을 거쳐 겨우 아버님 이름을 호적에 올릴 수 있었지만 아버님이 국적 회복을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80년도 후반기에는 가짜 자식이 나타나 10년 동안 법정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씨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친자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친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남편의 무덤까지 파헤칠 수밖에 없었다는 비화를 털어놓는다.
이씨는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나라에서 나오는 연금까지 끊겨 사글세를 전전했다”며 “내가 알기로는 현재 상당수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이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