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재 신채호 선생 | ||
더군다나 신 선생의 경우 현행법상 국적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인 것으로 드러나 향후 큰 논란이 예상된다.
단재의 후손들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독립 투사를 두 번 죽이는 꼴”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폭로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단재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60). 이씨는 “아버님이 민족을 위해 희생한 사실은 온 국민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민족 계몽에 앞장선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됐지만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국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
신채호 선생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논설 등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는 일. 그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논설을 썼을 뿐 아니라 해외의 영웅전과 역사전을 발표,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이와 동시에 ‘대한협회보’와 ‘기호흥학회보’ 등에 논설을 발표해 친일조직인 일진회 성토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또 일제가 국권을 강탈했을 때는 독립운동가로 변신, 해외에서 피나는 투쟁을 전개했다. 1915년 상해에서 신한청년회를 조직했으며, 1919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928년 민족 잡지인 ‘탈환’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 1936년 중국 뤼순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씨는 민족 영웅이 국적도 없는 ‘떠돌이’로 전락한 배경에 대해 “암울한 시기를 보낸 민족의 비극”이라고 지적했다.
이씨에 따르면 신채호 선생이 무국적자로 방치된 것은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호적법 때문.
일제는 1912년 식민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조선민사령을 공포했다. 조선민사령이란 출생이나 사망, 이사, 혼인 등의 신분 변동이 있을 때 일제에 신고를 하는 일종의 호적법.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호적법이나 호주제는 이때 만들어진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씨는 “당시 일제는 독립투사를 색출하기 위해 조선민사령을 공포했는데 아버님이 호적 신고를 거부했다”며 “오히려 신민회 사람들과 함께 중국 칭타오로 망명해 안창호, 이갑 선생과 함께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돌입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호적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게 이씨의 설명.
문제는 해방이 되어서도 신채호 선생의 국적 회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씨의 표현을 빌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신채호 선생의 관계는 한마디로 ‘물과 기름’ 사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단재 선생이 정면으로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단재 선생은 ‘신대한’이란 주간지를 발행해 이승만의 민족운동 노선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때문에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단재에 대한 추모사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는 게 이씨의 설명. 이씨는 “자유당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아버님에 대한 언급은 금기처럼 여겨졌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때는 단재의 후손들이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이씨에 따르면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족들이 성묘를 가면 경찰이 가족들을 따라다니며 감시를 했다는 것. 그 이유는 단재가 1923년과 25년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서’가 당시 운동권에서 교과서처럼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당시까지만 해도 친척들조차 아는 체하는 것을 꺼렸다”며 “한때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활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지금까지 단재의 국적 회복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뜻있는 인사들이 물밑에서 단재의 명예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단재의 외아들 신수범씨(91년 사망)가 대표적인 예. 이씨에 따르면 남편은 사망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호적을 되살리기 위해 국회의원, 교수, 장관 등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검찰청은 물론이고 법원, 국정원 등 안가본 곳이 없다는 것.
그러나 국적 회복이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호적법이 일제 시대 만들어진 조선민사령을 근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 이씨는 “여러 곳에 자문을 구해봤지만 현행법 아래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고 한숨을 지었다.
주무 관청인 대법원도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법원 호적과 한상호 계장은 “이미 사망한 사람에 대한 국적 회복은 현행법상 불가능하다”며 “신채호 선생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법을 바꾸지 않는 한 호적을 바꿀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석 프리랜서 zeus@newsbank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