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 출입하고 있는 한 베테랑 기자는 최근 춘추관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을 언급하면서 혀를 찼다. 그가 말한 ‘희한한 기자회견’은 지난 1월 2일 오후에 있었던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소위 ‘개각 부인 기자회견’이다. 이 기자는 “김 실장은 기자들이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비공식 백그라운드브리핑을 한 게 아니라 방송사 중계 카메라가 돌고 있는 상황에서 공개 회견을 한 것”이라며 “개각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개각 안 한다’는 발표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마나 황당했으면 기자들 사이에서 ‘전파 낭비’라는 얘기가 오갔겠느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전혀 개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긴급브리핑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잠시 뒤 4시 27분경 김기춘 실장이 춘추관에 나타나면서 이런 짐작은 현실이 됐다. 특히 김 실장이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것은 지난해 8월 이후 5개월 만의 일이어서 그의 등장 자체가 ‘중대 발표 예고’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김 실장의 기자회견 내용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경제 회복의 불씨를 살려서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도모해야 하고 엄중한 안보 환경 속에서 국가 안보를 공고히 지켜 나가야 하는 중대한 시기”라고 말문을 연 김 실장은 “따라서 내각은 추호도 흔들림 없이 힘을 모아 국정을 수행해야 할 때다. 그러므로 대통령께서는 전혀 개각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김 실장은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사라져 버렸고, 다음날 언론들은 그의 기자회견에 대해 ‘45초짜리’, ‘세 문장짜리’, ‘불통 논란을 자초한 하나마나한 회견’이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이런 기자회견을 왜 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자기들이 하도 거짓말을 하니까…”라는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정현 홍보수석이 여러 차례 “현재로서는 개각을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음에도 언론에서 개각 보도가 끊이질 않자 인사위원장인 김 실장이 직접 진화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 실장의 희한한 기자회견 과정을 지켜본 정치권 인사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 실장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청와대가 당분간 흔들림 없이 경제 살리기와 안보 지키기, 비정상의 정상화 등 개혁 작업에 매진한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강하게 개각 가능성을 닫고 갈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현재의 장관들이 문제가 많다는 건 청와대도 알고 여당도 알고 국민들도 아는 일”이라며 “개각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왜 우스꽝스러운 기자회견까지 해 가며 ‘개각 안 한다’고 못 박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새누리당 회의에 보고하러 갔다 난타당하고, 일부 장관들에 대해서는 여당에서부터 경질 주장이 나오는 마당에 청와대가 왜 스스로 선택지를 좁히느냐는 것이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철도 파업 당시에는 청와대에서도 “장관들이 안 움직인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런 고위직 줄사표가 다른 부처로도 확대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도 이런 대대적인 물갈이 가능성을 시사했다. 또 김행 전 대변인이 사퇴하는 등 청와대 참모진들에 대한 개편도 진행되고 있다. 다른 곳에선 다 대대적인 인적쇄신이 이뤄지고 있는데 장관들은 바꾸지 않겠다는 이상한 논리로 귀결되는 셈이다.
이 때문에 누가 봐도 이상한 청와대의 최근 행보의 원인을 ‘인사 트라우마’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국회의 인사청문회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장관들을 바꾸고 싶어도 못 바꾸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임기 첫 해인 지난해 잇단 ‘인사참사’에 시달렸다. 이명박 정부에 비해 사전 검증 항목을 대폭 늘렸는데도 인사청문회를 포함한 공개 검증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적지 않은 후보자들이 낙마하고 말았다.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를 비롯해 김종훈(미래창조과학부 장관)·김병관(국방부 장관)·한만수(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등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황교안(법무부)·윤진숙(해양수산부)·문형표(보건복지부) 장관처럼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누더기가 될 정도로 난타당한 채 장관 업무를 시작한 사례도 적지 않다.
김기춘 실장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경제 회복의 불씨를 이어가고 국가 안보에 신경 쓰는 게 다급하긴 하지만, 인사청문회가 무서워 개각을 미루는 것은 정도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박 대통령이 집권 2년차인 2014년에 공공부문과 노동계 등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상황인 만큼 개각은 더더욱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새누리당 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장관들이 안 움직인다’고 해놓고 그런 장관들을 방치한다면 그 자체로 모순”이라면서 “역대 정부들도 임기 첫 해에 시행착오를 겪은 뒤 2년차에 개각을 통해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민주당 관계자도 “존재감 없다는 평가를 받는 장관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건 앞으로도 대통령 혼자 다 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밖에 없다”며 “리더십의 한계를 보여준 장수들을 데리고 무슨 개혁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