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구 지하철 방화 대참사 역시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빚어낸 범죄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가고 있다. 하지만 묻지마 범죄의 징후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오는 사이에 이미 어두운 그림자는 여러 차례 우리 사회에 경고를 던졌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 행위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것은 방화이다. 미국처럼 총기 사용이 자유롭지 못한 국내에서는 최근 10년간에 걸쳐 방화 사건이 매년 5.4%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불만해소 차원 방화’의 급속한 증가율이다.
행정자치부 방호과의 최근 10년간 방화 현황 자료를 살펴본 결과 이미 대구 참사는 몇 해 전부터 충분히 예견되어 온 불행이었다. 10년 전인 1993년과 비교해 봤을때 가정불화(-5.7%) 싸움(0.1%) 비관자살(-19.4%) 정신이상(-3.8%) 등으로 인한 방화는 모두 줄어들었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던 데 반해, 불만해소 방화는 16.2%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5년간의 증가율은 무려 22.5%에 이른다.
방화건수로 따져도 93년의 경우 가정불화(3백4건) 비관자살(2백36건) 싸움(2백6건)에 이어 불만해소(1백16건)는 네번째였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지난 3년간 불만해소는 총 8백95건으로 가정불화(8백22건)를 제치고 단연 1위에 올랐다.
불만해소 차원의 방화는 그야말로 사회 전반에 대한 화풀이성 범죄이다. 2000년대 들어 우리 사회에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빈번한 화풀이성 범죄는 이미 몇 차례 우리에게 경고를 던졌다. 그저 정신 이상자의 단순한 해프닝성으로 웃어 넘겼던 숱한 사건들.
▲ 검은 연기로 뒤덮인 도심- 화재와 함께 순식간에 연기에 휩싸인 대구시내(위), 환자를 후송하는 구급요원과 소방관. | ||
당시에는 신문 가십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데 그쳤으나, 지금 돌이켜보면 엄청난 대형 참사를 불러올 뻔했던 대표적인 사례 세 가지를 재조명해 본다.
[사례1]
수백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대참사의 현장은 어쩌면 대구가 아닌 부산일 수도 있었다. 지난해 2월 부산대학교 병원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은 실로 아찔한 사건이었다. 환자 보호자는 물론 병원 관계자들만 해도 수백 명이 넘는 곳이었다.
이 병원 7층 739호실에서 지난해 2월15일 오전 화재가 발생했다. 방화자는 당시 병원에 입원중이던 김아무개씨(44·여)의 남편 오아무개씨(48)였다.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오씨는 극심한 생활고로 가족간의 불화가 잦았다. 김씨가 입원한 것도 일주일 전 부부싸움 도중 남편 오씨가 흉기로 찔렀기 때문.
상해혐의로 경찰조사를 받던 오씨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아내에 대한 미움을 견디지 못해 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병원에 불을 지르기로 작정했다. 오씨는 이날 아침 식사를 전달하는 시간에 아내가 입원한 739호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아내가 누워있던 침대와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불길은 번졌고 병원은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바로 옆 병실인 740호실에는 한 소방대원이 있었다. 부산 남부소방서 소속의 신아무개 소방장(48)이 사흘 전 산불화재 진압시 부상을 입어 옆 병실에 입원중이었던 것.
갑작스런 화재에 환자와 가족들, 병원 관계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병실 부근 1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마다 대피하느라고 아우성이었다. 특히 몸이 불편한 환자들의 고통은 극심했다. 이때 신 소방장은 복도에 비치된 분말소화기를 들고 739호실에 뛰어들어가 진화작업을 펼쳤다. 그리고 오씨 등을 끌어냈다. 병원에서도 소방서에 긴급 연락, 대규모 소방차량이 출동하면서 가까스로 초기 진화에 성공했다. 신 소방장의 침착한 행동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대참사는 불을 보듯 뻔한 순간이었다.
▲ ‘화마’가 할퀴고 간 지하철 안에 남은 것은 오직 잿더미뿐 이었다(위). 불탄 차량을 둘러보던 유족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 ||
대구 대참사가 발생한 지난 18일, 자칫했으면 하루 두 건의 대형 참사가 연쇄적으로 벌어질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나이트클럽 종업원이 자신을 무시하고 입장을 시켜주지 않는 데 대해 앙심을 품은 한 30대 남자가 방화를 기도했다가 미수에 그쳤기 때문이다.
18일 오후 11시30분께 수원시 팔달구 영동 지동종합시장 상가건물 3층 H나이트클럽 입구에서는 옥신각신하는 다툼이 발생했다. 곽아무개씨(38) 일행의 입장을 나이트클럽 종업원들이 막았기 때문이다. 종업원들은 “이미 술에 너무 취했으니 그만 돌아가라”며 밖으로 쫓아냈다.
친구들은 돌아갔으나 곽씨만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인근 주유소로 향했다. 일용노동직으로 힘들게 생활했던 곽씨는 ‘이젠 술집에서까지 나를 무시한다’는 적개심으로 휘발유 18ℓ 1통을 3층 나이트클럽 입구에서부터 1층 계단 밑에까지 모두 뿌렸다. 그리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찰나, 종업원 하아무개씨(26)가 덮쳐 가까스로 방화를 막았다.
나이트클럽 폐쇄회로(CC) TV를 통해 곽씨가 손에 뭔가 통을 들고 오는 것을 발견한 하씨는 갑자기 휘발유 냄새가 나자 급히 뛰쳐나가 곽씨를 막았던 것. 수원중부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곽씨가 상당히 만취한 상태였던 만큼 만약 하씨의 대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엄청난 대화재가 발생했을 것”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상가 건물은 4층으로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3층의 나이트클럽에는 1백 명 이상의 손님과 종업원이 있었고, 또한 4층은 주거 공간이었기 때문에 30여 가구의 60여 명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례3]
1997년 5월 인천 계양구 임학동과 계산동 일대 주민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떨었다.
최근 1년여에 걸쳐 이 일대에 화재가 47차례나 발생한 것. 초기에는 주차해둔 차량이나 가건물 등이 밤새 전소되는 정도에 그쳤으나, 갈수록 방화의 강도와 위험성은 더해갔다.
다방 등 영업소 입구에 불을 내는 것은 물론, 대형 버스에도 불을 질렀다. 주로 모두가 잠든 새벽에 방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조기 발견이 늦는다면 대형 화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이렇다할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불안에 떨던 주민들이 묘안을 짜낸 것은 무인카메라의 설치.
무인카메라에 찍힌 범인은 임학동에서 체육사를 운영하던 김아무개씨(32)였다. 김씨가 이처럼 상습적으로 불을 지른 이유는 “장사가 너무 안된다”는 것. 김씨는 “계속되는 불경기로 가게 월세도 못낼 지경에 이르러자 사회가 너무 원망스러웠다”고 방화 이유를 설명했다.
주민들이 무인카메라 설치로 김씨의 범행을 잡아내지 못했더라면 그의 범행 강도는 도를 넘어서서 인천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 뻔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