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이 전북 현대 유니폼을 입었다. 8일 브라질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날, 전북 봉동에 위치한 클럽하우스에서 김남일을 만났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러시아 톰 톰스크에서 인천으로 복귀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원래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나.
“(한참 생각을 하다가) 그건 아니었지. 뭔가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른 나라를 알아봤거든.”
―무슨 준비를 말하는 건가?
“선수 생활 이후의 삶에 대해서. 외국에서 선수로 뛰며 시스템을 배울 수 있는 그런 팀을 찾아봤는데 잘 안됐어. 그래서 빨리 접었지.”
―지도자 김남일은 쉽게 상상이 안 된다.
“왜 안 돼? 내가 성질이 더러워서?”
―하하, 그게 아니라 김남일 코치, 김남일 감독 이란 타이틀이 지금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럴 거야. 나도 어색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지금 당장 벌어질 일은 아니니까.”
―전북 봉동에서 드디어 이동국을 만났다(웃음).
“한 번은 꼭 같은 팀에서 뛰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 정말 몰랐어. 동국이랑 대표팀에서 만나면 기대 이상으로 호흡이 척척 맞았어. 아마 동국이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야. 날 좋아한 걸 보면(웃음). 그래도 마지막(?) 팀에서 이렇게 인연을 맺었네. 그러고 보면 최강희 감독님도, 동국이도 프로 첫 팀에서 만날 뻔 했다가 이렇게 마지막에 만났다는 공통점이 있네.”
―최강희 감독 말에 의하면 이동국이 김남일을 업고 다녀야 한다고 하시더라.
“업고 다닐지, 버리고 도망갈지는 경기를 해봐야 알지 않겠어? 동국이가 봉동 청년회장이라면서? 그럼 난 봉동에서 이장이라도 할까?”
―봉동 이장은 최강희 감독이 맡고 계신다.
“그럼 취소! 감독님이랑 이장 선거에 나갈 수는 없지.”
―이동국을 만난 반면, 설기현과는 헤어지고 말았다. 설기현은 인천과 재계약을 했다.
“어휴, 기현이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파. 내가 평생 미안해야 할 사람이 두 명 있거든. 바로 유동우 코치와 기현이. 유 코치님은 한양대 선배로 인천에 와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 몸 관리하는 것부터 운동장 나가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던 거지. 기현이는…, 기현이 얘기하려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네. 그동안 기현이하고는 아내보다 더 자주 오랫동안 붙어 다녔어. 별의별 얘기를 다 했지. 계약 과정도 기현이에게는 솔직히 털어놓았어. 오퍼가 오면 어디서 오퍼가 왔다고 말한 적도 있고. 우린 둘 다 같은 팀에 있길 바랐어. 정말 간절히 바랐는데 결국엔 나 혼자 와서 미안하다고 했지.”
―설기현도 ‘형’을 떠나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건, 난 진짜 마음 아파한 반면에 기현이는 오히려 ‘형, 프로답게 어디를 가든 열심히 하면 돼’라고 위로를 해주는 거야. 순간 기현이가 선배인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너무 아닌 척 하는 기현이 모습이 안타깝고 아프더라.”
―설기현과 대표팀에서도 오랫동안 봐 왔을 텐데, 인천에서 같이 생활하며 더 친해졌다고 들었다.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하대. 기현이에게 ‘우린 왜 대표팀에서 안 친했지?’하고 물은 적이 있을 정도야.”
―설기현의 대답은?
“‘과’가 틀렸대.”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스페인과의 경기. 사진공동취재단
―무슨 과를 말하는지.
“기현이는 이영표 송종국 등 ‘교회파’였잖아. 말도 많고, 모이면 기도부터 하고…. 내가 그 ‘과’에 들어갈 수 없는 거잖아.”
―그럼 어떤 ‘과’에 들어간 건가.
“하하, 말이 별로 없는 사람들.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지. 그게 바로 (박)지성이, (이)을용이 형, (안)정환이 형들이야.”
―‘과’가 달랐던 설기현과의 인천 생활은 어떠했나.
“처음엔 힘들었어. 너무 성실해서(웃음). 그러다 기현이가 점점 좋아지더라고. 진심, 진실, 진정성 등등 뭐, 그런 멋진 걸로 포장이 되는 녀석이었어.”
―다시 대표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지난해 5월, 3년 만의 대표팀 복귀? 어떤 심정이었나.
“설렘? 긴장? 과는 거리가 멀었어. 좀 ‘뻘쭘’했지. 낯설어서. 이건 좀 엉뚱한 얘기일 듯한데, 솔직히 궁금했어. 소문에는 대표팀에 파벌이 있다는 거야. 진짜 그럴까? 싶었거든. 그런데 막상 접해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았어. 우리 때도 마음 맞는 애들끼리 몰려다녔잖아. ‘교회 과’가 있듯이 말이야. 그때도 괜찮았는데 지금이라고 무슨 문제가 있겠어. 정작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나였어. 엄청난 훈련량으로 경기에 뛰기도 전에 쓰러질 판이었으니까. 선수들 모두 클래스가 있는 애들이잖아. ‘올드보이’라고 칭하는 선수가 막차를 타고 들어와서 빌빌대면 꼴불견일 거 아냐. 그런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니 방전이 된 거지. 최강희 감독님 참 재밌으셔. 미팅할 때는 마음 편히 하라고 해놓고선 훈련 때는 빡세게 돌리시고. 내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부담이 컸었어.”
―그래서 레바논과의 원정 경기 후 햄스트링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라인업에서 빠지겠다고 먼저 말을 했던 건가.
“그렇지. 부상 후 팀에 보탬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 나 보다 더 좋은 기량을 갖춘 선수들도 많았잖아. 경기 출전에 대한 욕심을 부리면 팀이 손해겠다 싶어서 감독님을 찾아가 말씀을 드린 건데 나를 울산(이란전)까지 데리고 가시대.”
―뛰지도 못한 상황에서 대표팀 일정을 같이 하는 심정이 편치는 않았겠다.
“선수들 눈치 보며 조심 조심 다녔어. 그래도 꿋꿋했어. 기죽지 않으려고.”
―그런 경험을 하고 소속팀으로 돌아왔을 때의 기분이란?
“어휴, 말로 표현 못할 정도였지. 내 세상 같았으니까. 대표팀에 들어가 보니까 선수들 개개인의 역량과 잠재력이 엄청나더라고. 내가 나이 먹었다고 해서 후배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됐어. 다들 급이 있는 선수들인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어. 그냥 방에서 조용히 지낼 수밖에.”
―김남일 축구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 2002년 월드컵 맞나?
“당연하지. 그때 같이 뛰었던 형들이 지금 지도자 하거나 은퇴하는 걸 보면 감회가 새로워. 믿을지 모르겠지만, 난 매일 기도해. 형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2002년 멤버들이 잘 되는 걸 보면 뿌듯해지면서 기분이 좋아. 그래서 전화했는데 전화를 안 받대.”
―누가 전화를 안 받았나.
“(황)선홍이 형. 전화를 안 받아서 ‘앞으로도 계속 좋은 모습 보여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문자를 보냈거든. 아직까지 답장이 안 와. 난 진심이었는데.”
―그동안 지켜본 은퇴식 중 가장 인상적인 은퇴식을 꼽는다면?
“선홍이 형, (홍)명보 형이 합동으로 은퇴식했을 때! 그 순간은 정말 잊지 못해. 감동이었으니까. 반면에 (이)영표 은퇴식은 별로였어. 내가 그 녀석 때문에 힘들었다니까. 외국에서 활약한 놈이면 그냥 외국에서 은퇴하고 오지, 은퇴식을 한국에서 치르는 바람에 그 불똥이 다 나한테 튀는 거야. 동갑내기 이영표는 은퇴하는데 김남일은 왜 은퇴 안 하느냐면서(웃음).”
―브라질에서 두 팀의 전지훈련이 벌어지는데, 하나는 전북현대이고, 또 하나는 축구대표팀이다. 김남일은 전북 현대 소속으로 브라질 훈련에 참가하는 것이고.
“굳이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잘 알아. 브라질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네. (김)태영이 형에게 대표팀 전지훈련 장소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전북이랑 아주 다른 곳이더라고. 가까운 거리라면 잠깐이라도 가서 대표팀 훈련장 잔디라도 밟고 오려 했더니만.”
―대표팀 승선에 대한 마음을 비웠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비우고 있으니까 비움을 강요하지마. 그런데 꼭 비워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브라질월드컵 승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는 의미?
“여전히 관심은 있어. 하지만 조금씩 덜어내고 있는 중이야.”
―브라질월드컵 대표팀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있다면?
“유럽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의 기량이 대단해. 독일, 남아공월드컵 때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아. K리그 선수들도 그렇고. 반면에 너무 어린 선수들 위주로 대표팀이 구성되는 건 약간의 조심스럽다고 봐. 감독 성향에 따라 선수들 구성이 달라지겠지만, 내 입장에선 조금 아쉽지. 2002년 월드컵 때를 떠올리면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는 선배들이 벤치를 지키며 후배들을 응원하고 다독거리고 조언해주는 부분이 큰 힘이 됐거든. 경기를 뛰는 후배들은 그 선배들을 위해서 한 발씩 더 뛰어 다녔어. 그땐 선수단 전체가 똘똘 뭉쳤어. 마음과 마음, 진심과 진심이 통했고, 좋은 결과가 나올 때마다 벤치에 있는 선배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더 좋아해줬으니까. 좋은 성적은 그라운드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야. 생활에서 나오는 거야.”
―홍명보 감독이 대표팀을 맡고 나선 연락하기가 어려워졌겠다.
“그게 그렇더라고. 선홍이 형한테는 편하게 문자할 수 있는데, 명보 형한테는 문자 한 통도 자꾸 생각을 하게 돼. 새해 인사, 크리스마스 인사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런 안부 문자를 보내는 것도 마치 날 뽑아달라는 메시지로 비춰질 것 같아서 못하겠더라고. 2년 전 인천유나이티드 입단 후 K리그 미디어데이 때 (황)선홍이 형을 오랜만에 만났어. 형이 날 보자마자 ‘야, 넌 형한테 연락 좀 하지 그랬냐’라고 하시대. 그때도 그랬어. ‘내가 어떻게 연락하느냐. 내가 연락하는 건 마치 나 좀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 같아 못했다’라고.”
―전북 현대와 계약할 때 계약 기간이 있었나.
“감독님이 그러셨어.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자고. 당신이 먼저 은퇴 얘기는 안 꺼내실 거라고. 그래서 나 은퇴 안하려고(웃음). 여기 와서 보니까 (김)상식이 형이 존경스러워. 구단에서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은퇴를 했다는 사실이. 그래서 훈련할 때마다 내 자신에 대해 물음표를 갖게 돼.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몸에서 스톱하라고 사인을 보내는 건 아닌지. 그 사인이 올해 올 수도 있고, 내년에 올 수도 있겠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사인이 오면 그만둬야 하지 않겠어?”
김남일은 ‘마음을 비우고 있다’는 말로 브라질월드컵에 대한 기대를 지우려 애썼다. 그런 비움과 지움을 갖고 그는 브라질 전지훈련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시크한 매력을 풀풀 풍기며 인터뷰를 마친 김남일. 2004년 12월, 전남 소속이었을 당시, 김남일과 인터뷰 말미에 다섯자 토크를 했던 기억이 났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여기에 옮겨 담는다. 머리 쓰는 걸 귀찮아 하는 김남일이 다섯자 대답을 만들어 내려고 손가락을 꼽으며 애썼던 장면이 오버랩됐다. 결혼 전의 김남일이었던 터라 질문 중 여자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됐다.
―어릴 적 꿈은? 기억이 안 나.
―공부 잘 했어? 정말 못했어.
―첫사랑 있어? 있긴 있었지.
―사랑이 모야? 알 수가 없어.
―첫키슨 언제? 고3 때 했어.
―야한 것도 봐? 몇 번 봤었지.
―노래는 잘 해? 좀 하긴 하지.
―십팔번 뭐야? 제목이 길어.
―휴가때 뭐해? 지하에 있지.
―여자였다면? 끔찍할 뿐야.
―결혼은 언제? 생각 좀 하고.
―애인은 있어? 작업중이야.
―은퇴 후 계획? 1년은 쉰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