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8일 승가사에서 확인한 결과 시주장부에는 SK의 10억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 ||
이런 가운데 SK측이 10억원을 시주한 곳으로 밝혀진 승가사의 시주 장부에는 SK의 시주금 내역이 기록돼 있지 않아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시주금에 대한 영수증 처리 문제 역시 분명하지 않아 의문을 남기고 있다.
특히 “시주를 받고 바로 SK 명의로 영수증을 발급했다”는 조계종의 발표와 달리, 승가사측은 “사찰 명의로 10억원에 대한 영수증을 발급했으나, 영수증에 발급대상자에 대한 이름을 쓴 기억은 없다”고 밝혀 말이 엇갈렸다.
지난 17일 오후 이남기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SK쪽에 자신이 다니던 한 사찰에 10억원을 시주토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얘기가 검찰을 통해 불거지면서 불교계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이 전 위원장에 대한 이른바 ‘제3자 뇌물수수’죄의 적용이 거론되면서, 뇌물을 시주로 받은 것처럼 비친 조계종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처럼 이 전 위원장의 구속 사건이 자칫 검찰과 불교계의 전면전 양상으로 비화될 즈음인 18일 오후 <일요신문>은 서울 북한산에 위치한 승가사를 직접 찾았다. 하루종일 내린 비 탓인지, 아니면 문제의 사찰이 언론에 직접 거론되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승가사는 바깥 속세의 소란스러움은 전혀 안중에 없는 듯 조용했다.
승가사의 진묵 스님은 “우리는 처음에 10억을 시주한 곳이 SK였는지도 몰랐고, 따라서 최태원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그는 이남기 전 위원장에 대해서도 “가끔 우리 사찰에 오는데, 아주 불심이 깊고 겸손한 분”이라며 “워낙 조용히 왔다 내려가시기 때문에 난 그분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SK의 10억원 시주에 대해서도 승가사측은 이 전 위원장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검찰의 주장에 대해 “이 전 위원장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진묵 스님은 “우리 사찰의 명예 신도회장이신 명호근 회장님(현 쌍용양회 사장)께서 화주자로서 시주를 모으는 데 많은 애를 써 주셨다”면서 “당시 10억도 명 회장님이 기업으로부터 시주를 받아왔다고 내놓으셔서 감사하게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불교 용어상 사찰에 기부하는 행위는 시주와 화주로 나뉜다. 시주는 본인이 직접 사찰에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행위를 말하고, 화주는 본인이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를 부탁해서 대신 전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현재 쌍용양회 사장인 명 회장이 기업인들과의 인맥을 통해 화주자로서 많은 업적을 보였고, 이번 SK건도 그런 차원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승가사측의 설명.
▲ 명호근 사장(왼쪽), 이남기 전 위원장 | ||
사찰측이 직접 장부를 넘기며 보여줬기에 찬찬히 확인해 볼 수는 없었으나, 얼핏 봐도 기업의 이름이나 눈에 띄는 인사의 이름은 없었다. 또한 수천만원 이상 억대 규모의 시주 내용도 없었다.
기자는 “지난해 SK가 10억원을 시주한 기록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승가사측은 “SK 시주는 명 회장이 직접 들고 왔기 때문에 이 장부에는 적어 두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전 위원장의 시주 내용 역시 보여주지 않았다.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승가사측은 “앞으로 모든 자료는 조계종 총무원으로 넘길 것이며, 언론 접촉도 총무원을 통해서 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승가사측은 신도 명부를 보여달라는 요구에도 역시 응하지 않았다. 다만 “최태원 SK 회장이나, 시주를 한 김창근 사장 등은 신도 회원이 아닌 것으로 안다. 언젠가 명 회장님이 최 회장을 우리 신도로 만들기 위해 애를 많이 쓴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밝혔다. 고 최종현 전 회장의 회원 여부에 대해서는 “오래전의 일은 잘 모른다”고 밝혔다.
지난 18일 오후 “영수증을 정상적으로 처리했다”는 조계종의 발표가 나왔지만 그 전에 사찰측이 밝힌 내용은 다소 엇갈린다. 승가사측은 “시주란 신도가 성의를 표하면 우리가 그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축원을 빌어주는 것이지, 기업의 회계장부처럼 일일이 영수증을 써주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사찰측은 “다만 기업 등 일부 신도의 경우 연말 세금 정산 문제로 영수증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SK도 그런 용도로 나중에 영수증을 요구한 것으로 안다”면서 “하지만 영수증도 명 회장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사찰 직인을 찍어 주었을 뿐, SK나 최태원이라는 이름을 써준 기억은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SK가 영수증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발행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SK의 시주금을 전달한 명호근 사장과 이 전 위원장은 소문난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져 있다. 이 전 위원장은 어머니의 위패를 모실 정도로 승가사와 3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고, 명 사장 역시 승가사 명예 신도회장으로서 두 사람 모두 이 절의 주지인 상륜 스님과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이 불교계의 전언이다.
검찰은 “승가사 시주에 대해 두 사람이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명 사장은 “이 전 위원장을 안 지는 1년6개월 정도밖에 안 됐으며, 주지스님의 병문안 때 처음 인사했다”며 “그때 불사와 관련해서 ‘땅 1평사기’등의 행사가 죽 진행되고 있는데, 불자 기업인들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는 나눴다”고 조계종을 통해 밝혔다.
한편 조계종 총무원측은 문제의 시주장부에 대해서 “아직 승가사로부터 넘겨받은 시주장부는 없으며, 불교의 특성상 시주 내용을 함부로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종단 차원에서는 일말의 의혹도 없도록 할 것”이라며 “언론에서 요구하면 더 엄중히 조사해서 관련 내용을 공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