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디언 복장을 한 사신 리틀페더라는 여인이 말런 브랜도의 남우주연상 수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배우로서 처음으로 트로피를 거부한 사람은 43회 시상식의 조지 C. 스콧이었다. <패튼 대전차 군단>(1970)에서 조지 패튼 장군을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광기로 연기해낸 그는, 이견의 여지없는 그해의 남우주연상 수상자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배우와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싫고 난센스라며 수상을 거부하며 “집에서 TV로 하키 경기나 관람하겠다”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시상식에선 제작자인 프랭크 맥카시가 대리 수상을 했지만, 다음 날 아카데미 위원회에 트로피를 반납했다. 스콧이 전화를 걸어 돌려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앞의 두 사례는 1973년 38회 시상식의 말런 브랜도에 비하면 소극적인 저항일지도 모르겠다. 1952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로 첫 후보에 오른 그는 <워터프론트>(1954)로는 첫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요나라>(1957)로 다시 후보에 올랐지만 이후 한동안 오스카와 멀게 지내던 그는 1973년 시상식에서 다시 한 번 영예를 안는다. 영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대부>(1972)에서 보여준 연기로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하지만 시상식장에 그의 모습은 없었다. 시상자로 나온 사람은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로저 무어와 스웨덴 출신의 명배우 리브 울만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 마이클 케인, 피터 오툴, 폴 윈필드 그리고 말런 브랜도. 다섯 명의 후보 중 수상자는 브랜도였지만, 객석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낯선 여인이었다.
사실 브랜도는 그녀에게 무려 15페이지에 달하는 연설문을 주었다. 리틀페더가 그것을 모두 읽겠다고 하자 시상식 쇼의 프로듀서는 연설문을 빼앗으려 하며, 만약 60초 이상 수상 소감을 전하면 경찰에 의해 체포될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즉흥적으로 1분가량 이야기했고, 무대에서 내려가 백스테이지에서 기자들을 앞에 놓고 브랜도의 연설문을 모두 읽었다. 트로피는 시상자인 로저 무어가 잠시 간직하고 있다가 아카데미 위원회에 돌려주었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브랜도는 매우 정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엔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했고, 1960년엔 케네디의 선거 운동에 참여했다. 1963년엔 동료 배우들과 함께 워싱턴 행진에 참여해 사람들과 함께 반전 구호를 외쳤다. 또한 아메리칸 인디언 운동(American Indian Movement·AIM)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때 오스카 시상식이 있었고, 수상을 예감(?)한 브랜도는 거대한 ‘리얼 쇼’를 기획했고, 사람을 수소문하던 중 마리아 크루즈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바로 ‘사신 리틀페더’라는 인디언 식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간 그 여성이었다. 당시 27세였던 그녀는 인디언의 권리를 위한 단체의 액티비스트였으며, 1969년엔 미국 정부가 인디언을 몰아내고 빼앗은 알카트라즈 섬을 점령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는 절반만 인디언이었다.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아파치족, 야쿠이족, 푸에블로족 등이 섞인 인디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계와 독일계와 네덜란드계가 섞여 있었다. 인디언 부족 연합의 일원이던 그녀는 브랜도와 알게 되고, 그날 밤 시상식에 차분한 충격을 안겨 준 헤로인이 된 것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