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은행과 돈 거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20억원 가까운 거액을 1만원권 현찰로 들고와 ‘직거래’한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돈이 맡겨진 시기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다시 불붙는 시점과 공교롭게도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돈의 성격을 두고 ‘검찰의 불시 압수수색에 대비하기 위해 돈을 빼돌렸을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현찰 18억원은 기업의 긴급 운용자금으로는 너무 많은 돈이라는 게 금융계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과연 무슨 말 못할 사정 때문에 K그룹이 급하게 돈다발을 은행에 싣고 왔을까. 18억원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따라가 봤다.
지난 12월 초순께 서울 강북의 한 시중은행 지점에 승합차가 들어섰다. 곧이어 양복을 빼입은 몇 명의 사나이들이 차량에서 빠져나와 급하게 은행문을 열어젖혔다. 이들이 타고 온 차량에는 10여 개의 검은 색 가방과 박스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현금 다발이 1억~2억원씩 빼곡이 쌓여 있었다.
“지금 현금 18억원을 가지고 왔는데 잠시만 맡아 주십시오.”
“아니, 그렇게 많은 현찰을 어떻게…. 우리 은행은 현금 보유한도액이 고작 8억원에 불과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맡아도 ‘처치곤란’입니다.”
하지만 사나이들의 통사정에 은행측은 할 수 없이 거액 18억원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자주 거래하던 ‘큰손’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 사나이들이 거액의 현금을 가지고 들어서자 잠시 은행이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많은 돈이 은행에 들어온 일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액 현찰을 들고 왔던 사나이들은 K그룹 핵심부서 관계자들. 이들은 은행에 18억원을 맡긴 지 10여 일 만에 다시 이 돈을 모두 찾아갔다고 한다. 과연 문제의 돈은 어떤 성격의 돈일까.
먼저 이 돈이 맡겨진 시기를 전후해 K그룹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K그룹 총수는 지난 11월 중순 대기업 회장으로는 이례적으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바 있다. 이때 대검이 그룹 회계장부 등을 ‘비공식적’으로 요청하자 이 총수는 ‘내 진술이 필요하다면 출두해 조사를 받겠으며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법원 영장 따윈 필요 없으니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면서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K그룹의 경우 압수수색이 조용히 마무리되었고 이 총수 역시 시내 S호텔에서 ‘조용히’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K그룹은 ‘검찰 협조기업’으로 분류돼 비교적 검찰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전해진다. 언론에 K그룹 총수의 소환 소식 등이 자세히 보도되지 않은 것도 검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그룹측의 ‘작전’ 덕분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그 뒤 검찰은 지난 11월 말 삼성전기, LG홈쇼핑, 현대자동차 등 5대 기업에 대해 강도 높은 압수수색을 실시한 바 있다. 이는 대기업에 대한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검찰은 대기업에 대한 ‘압박’을 잠시 미루다 지난 12월5일 롯데에 대한 압수수색을 전격 실시하며 수사 재점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롯데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으로 기업들은 ‘검찰의 대기업 사냥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며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바로 이때가 검찰의 수사 칼날이 5대 기업 외 K그룹을 포함한 다른 대기업들로 확대되는 시점이었다.
K그룹의 18억원이 은행에 맡겨진 시점도 공교롭게도 이 시기와 일치한다. K그룹은 이미 11월 중순 한 계열사가 검찰의 ‘압수수색’을 한 차례 받았지만 이때부터 그룹 차원에서 다시 검찰의 수사에 대비했을 수도 있다.
금융권의 관계자 A씨는 이에 대해 “은행과 기업의 돈 거래는 통상 자동이체와 수표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많은 현금을 은행에 싣고 가 맡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그 돈이 맡겨진 때가 검찰의 기업에 대한 대선자금 수사가 재점화된 시점과 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검찰의 전격 압수수색에 대비하기 위해 거액의 현금을 일단 은행으로 가지고 갔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은행측은 K그룹이 돈을 가지고 왔을 때 처음에는 완곡히 거절 의사를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마다 현금의 보유한도액이 있는데 이 은행지점의 경우 8억원이 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 금액을 훨씬 초과할 경우 본점에서 나머지 금액을 가져간다고 한다. 은행이 현금을 많이 보유해봤자 이자 손실만 늘어날 뿐 돈이 돌지 않기 때문에 이득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측은 큰 고객의 강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그 돈을 맡기로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 돈은 어떤 성격의 돈일까. 일반적인 기업 운용자금의 경우 그렇게 많은 돈을, 그것도 현찰로 보유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대기업 구조본에서 근무하는 B씨는 이에 대해 “대개 기업은 은행에서 당좌 계좌로 대출을 받아 그 금액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인출을 하고 있다. 그럴 경우 은행 간 자동이체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금으로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밝혔다. 18억원이 일반 운용자금이 아닐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그 돈은 ‘비자금’일까. 앞서의 B씨는 “회사마다 긴급자금은 모두 다 가지고 있다. 총수나 임원들이 드러나지 않게 쓸 수 있는 돈이다. 그 돈도 회사 비자금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B씨는 “아무리 큰 기업이라고 그렇게 많은 현금을 한꺼번에 보관하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기업에서 거액의 현금을 조달할 경우 정치권의 정치자금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고 추측했다.
그런데 K그룹은 18억원을 맡긴 뒤부터 며칠 동안 다른 개인명의 계좌에서도 계속 현금 수억원씩을 인출해갔다고 한다. 거액을 수표로 인출하지 않고 이동과 보관이 불편한 현금으로 찾아간 것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그리고 K그룹은 비슷한 시기에 개인주택을 담보로 20억~30억원의 대출을 신청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담보물이 ‘깨끗하지’ 않아 은행측이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면 K그룹이 자금난 때문에 긴급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현금 18억원과 긴급 대출 건도 이런 성격의 자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굳이 거액의 현금 다발이 필요했을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따른다.
기업의 비자금 수사를 오랫동안 해온 한 대검 수사관은 이에 대해 “기업에서 18억원이나 되는 많은 돈을 금고에 쌓아둘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 규모 정도의 현금이라면 1백% 비자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기업의 현금 보유와 은행 예치는 당연한 금융거래다. 하지만 18억원이나 되는 현찰을 남의 이목을 무릅쓰고 은행에 급히 가져왔다 10여 일 후 되찾아간 속사정이 무엇인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또 그룹측이 개인 명의의 계좌에서 현찰로 수억원씩을 계속 인출한 점도 의혹을 사는 부분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K그룹이 유독 현찰 거래에 치중한 것은 출처를 추적당하지 않을 거액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행여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 궁금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