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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98년 12월18일 열린 아태재단 후원의 밤 행사 장면. 맨 오른쪽에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 ||
김병호 아태평화재단 전 행정실장이 남긴 메모 하나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김씨는 지난 5월10일 검찰에 출두하기 직전 검찰청 앞에서 자신의 수첩을 꺼내 메모지 한 장을 찢어버렸다. 그런데 그가 버린 메모지에 ‘후광 돈 확인’ 등의 알쏭달쏭한 글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심상찮은 후폭풍이 일고 있는 것.
알려졌다시피 ‘후광’은 김대중 대통령의 아호. 김 전 실장은 ‘후광 돈’ 메모에 대해 “후광문학상 기금 마련 과정에 관한 것으로 대통령과 전혀 관련이 없다”며 파문의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지난달 27일부터 홀연히 행방을 감춰 문제의 메모가 남긴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과연 김 전 실장의 해명은 사실일까. 아니면 DJ와 관련된 말하지 못할 돈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가 흘린 메모 한 장에 담긴 비밀스런 행간을 추적해봤다.
김 전 실장의 후광 관련 메모에선 진실에 접근할 세 가지 키워드가 등장한다. ‘돈’, ‘확인’, 그리고 ‘후광’.
세간에선 먼저 ‘돈’의 실체를 두고 의혹의 시선이 모아졌다. 말로만 떠돌던 ‘DJ 비자금’의 단서가 아니겠느냐는 것. ‘후광’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아호가 함께 적혀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추측은 신빙성을 얻었다. 메모를 작성한 김 전 실장이 잠적 직전 내놓은 해명은 이렇다.
“아태재단이 잠정폐쇄되기 이틀 전인 4월16일 재단 이사회에서 논의된 내용이다. 회의중에 후광문학상 운영위 관계자 윤채한씨의 비리 관련 얘기가 나와 적은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해명에 대해 ‘비리 관련자’로 지목된 윤채한씨는 물론 장행훈 당시 아태재단 사무총장조차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92년부터 후광문학상을 운영해온 윤채한 우리문학사·우리집 농장 대표(53)는 김 전 실장의 주장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고 부인했다.
이사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는 장행훈 전 아태재단 사무총장 역시 “재단회의에서 후광문학상 얘기를 할 이유도 없고 관련 비리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지난 2001년께부터 아태재단측이 후광문학상을 직접 주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태재단이 잠정폐쇄될 때까지 재단에 근무한 한 관계자는 “2001년께 재단이 후광문학상 운영권을 윤채한씨로부터 가져왔다”고 말했다. “재단회의에서 후광문학상 얘기를 할 이유가 없다”고 밝힌 장행훈 전 사무총장의 말과 어긋나는 대목이다.
이 관계자는 “윤씨가 주관하는 후광문학상이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문학계의 잡음을 사왔다”며 “(재단측이) ‘말썽 일으키지 말라’며 (운영권을) 윤씨로부터 빼앗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후광문학상 시상식 행사가 열리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아태재단은 자체 기금을 마련해 문학상을 운영하는 방법 등에 대해 학계, 문단의 자문을 구해왔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당시엔 재단 내에 운영위원회도 구성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됐으며 사실은 올해부터 시상식을 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올해 1월 윤채한씨가 후광문학상 시상식을 치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후광문학상 운영권을 두고 아태재단측과 윤씨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태재단 관계자의 이같은 얘기대로라면 ‘후광 돈 확인’ 메모에 대한 김병호 전 행정실장의 해명이 일부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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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99년 열린 후광문학상 시상식 모습. 이 상을 만든 윤씨의 비리와 관련된 메모라는 김병호 전 실장의 주장 에 대해 당사자 윤씨는 “말도 안된다”며 반박했다. | ||
김 전 실장 등이 메모에 대해 밝힌 ‘해명’에 대해 후광문학상 제정자인 윤채한씨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며 펄쩍 뛰고 있다. 그는 ‘후광 돈 확인’이라는 메모가 문학상 기금 모금과 관련된 ‘추문’일 것이라는 일부 추측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다.
“문학상 후원회가 열리면 정치인들이 오긴 왔다. 하지만 참석자 대부분은 후원금 한푼 안내고 그냥 돌아갔다. 와서 눈도장만 찍고 그냥 사라졌다. 그리고 호텔에서 후원회가 열렸을 때는 15만원짜리 디너 티켓을 구입하지 않은 참석자들이 많아 적자를 크게 본 적도 있다.
문학상 운영이 어려워 한때는 수상자에게 상금을 못 준 적도 있다. 지난해에는 돈이 없어 시상식을 연기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후원금을 강요하거나 강제로 ‘수금’한 적은 없다.”
사실 후광문학상은 김대중 대통령의 아호를 딴 문학상으로 국민의 정부 초기에는 윤씨와 대통령 사이에 직통 채널이 있다는 소문까지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뒤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는 사람들이 없어 윤씨는 운영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도 김 전 실장이 ‘후광 돈 확인’이라는 정체불명의 메모를 해명하기 위해 후광문학상을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윤씨는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며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아태재단과 나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쪽 사람들과는 커피 한잔 한 적이 없다. 이수동씨는 동교동에 왔다갔다 하면서 본 적은 있다. 없는 돈에 문학상까지 제정했지만 전화 한통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후광문학상을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아태재단에 쏠린 비리 의혹을 후광문학상쪽으로 돌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번 메모 건에 대해 보다 철저한 검찰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씨는 후광문학상을 제정한 뒤 지금까지 일체의 대통령 ‘후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청와대 고위관계자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탄원서도 보낸 사실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런 윤씨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후광문학상의 기금 모금과 관련해 추문이 있었다’는 김 전 실장의 해명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메모 글에 담긴 ‘제 3의 행간’은 무엇일까. 정가 일각에선 문자 그대로 해석해 김 대통령과 관련된 돈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즉 대통령의 비자금이거나 아태재단에 ‘숨어 있던’ 대선 잔여금일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이다.
한 야당 정치인은 “검찰이 대통령 차남 김홍업씨의 친구 김성환씨의 자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용의 발톱’(대통령 비자금)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메모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정가에선 메모의 비밀을 놓고 이처럼 여러가지 해석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메모를 남긴 장본인은 행방을 감추고 있어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저 메모를 둘러싸고 또 하나의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김현 기자 nura@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