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충청지역 시찰 때 이용한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기곡리 171-23 ‘도고별장’ 전경. 아산시의 구획정리사업으로 ‘애물단지’가 됐다. 아래 사진은 별장 주인 이맹구씨가 ‘전시관’으로 만들기 위해 구한 박 전 대통령의 사진들. | ||
한때 짙은 베일에 가려져 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도고별장’은 박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지난 5월엔 담벼락이 헐렸고, 6월 초에는 별장을 관통하는 도로까지 개설된 것으로 확인됐다. ‘권력의 무상함’을 도고별장은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기곡리 171-23번지 일대 13필지에 자리잡은 ‘도고별장’. 기자가 방문한 지난 13일, 도고별장은 본채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대지 1천7백50여 평(5천7백95㎡)을 둘러싸고 있던 3m 높이의 담장은 이미 지난 5월에 헐린 상태였다. 외곽 담장과 별도로 별장 내부에 만들어졌던 담벼락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두 군데 나 있던 ‘육중한 대문’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한때 별장 정원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30년 이상 된 수백 그루의 향나무도 거의 다 뽑혀 구덩이가 움푹움푹 패여 있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향나무 몇 그루와 영산홍, 잣나무 등이 정원을 지키고 있을 뿐. 온통 잡초로 뒤덮인 정원은 이곳이 ‘대통령 별장’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뿐만 아니다. 아스팔트 도로가 별장 부지를 두 동강 내면서 관통하고 있었다. 어딜 봐도 3공 시절 당당한 위용을 자랑했던 ‘도고별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본채 건물만이 아직도 별장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부동산 등기부상 199-4번지에 있는 별장 본채는 단층짜리 건물이다. 건평은 93평(3백8㎡)으로 침실과 응접실과 서재, 사우나 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러면 어떤 사연이 있어 도고별장이 이렇게 황폐한 모습으로 변했을까. 그야 물론 ‘주인’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별장은 원래 박 전 대통령의 친구였던 최아무개씨(사망)가 1972년 신축해 ‘헌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이 이 별장을 여러 차례 다녀갔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이충무공 탄신기념일 행사에 참석하거나, 충남지역을 시찰할 때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 ‘도고별장’ 응접실 모습. | ||
이후 등기부상의 주인이었던 최씨는 이 별장을 부인과 두 아들 앞으로 명의를 이전했다. 최씨 가족은 서울에 거주하며, 별도로 관리인을 고용해 별장을 관리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별장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된 셈이다.
그런데 최씨의 아들이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2000년 처음 경매시장에 나왔다. 그런데 도고별장은 경매시장에 나와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최초 경매가는 27억4천만원. 하지만 여섯 번이나 유찰되면서 최초 경매가의 24%인 6억6천만원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2000년 7월 충남 온양에 사는 김아무개씨에게 낙찰됐지만, 경매절차상의 문제로 입찰이 취소됐다. 또다시 새 주인을 기다려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지난해 3월 아산시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이맹구씨(42)의 부인에게 어렵사리 낙찰됐다. 최종 낙찰가는 6억5천만원. 최초 경매가에 비하면 ‘헐값’에 팔린 셈이다.
이 별장을 낙찰받은 이맹구씨는 이곳에 사우나와 찜질방을 짓고, 본채 건물은 ‘박정희 대통령 전시장’으로 보존하려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이씨의 사업 계획은 제동이 걸렸다.
아산시에서 수립한 ‘도고·기곡지구 구획정리계획안’에 도고별장 부지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산시에서는 별장을 관통하는 도로를 새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씨는 시청과 시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사업구상을 설명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전시장’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시에서는 예정된 구획정리 사업을 그대로 추진했다. 그 결과 지난 5월, 별장 담장이 헐리고, 급기야 관통도로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 별장 뒤편엔 도로공사로 인해 허물어진 담장 잔해가 남아 있다. | ||
별장 담장이 헐리고, 도로까지 만들어지자 땅주인 이씨는 처음 수립했던 사업구상을 바꿀 생각이다. 사우나와 찜질방 사업은 그대로 추진할 방침이다. 그렇지만 본채 건물은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중이다. 본채 건물이 ‘애물단지’로 변한 셈이다.
이씨는 “본채를 (박정희 대통령) 전시장으로 만들지, 그냥 헐어버릴지 결정하지 못했다”라면서도 “도고별장은 이제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라며 씁쓸해했다.
이씨의 말대로 도고별장은 이제 사라져간다. 예전엔 3m 높이의 담벼락에다, 수십 년 동안 자란 울창한 정원수에 가려져 외부에서는 지붕만 겨우 볼 수 있었던 도고별장. 하지만 이제는 본채 건물을 겹겹이 에워싸던 ‘보호막’이 모두 벗겨졌다. 벌판에 덩그러니 단층 건물만 남은 것이다.
지난 3월경에는 청와대 경호실 간부 두 명이 이 별장을 찾아왔다고 주인 이씨는 귀띔했다. 도고별장 구조를 면밀히 조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만큼 대통령 경호에 도고별장은 ‘교과서’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예전의 ‘위풍당당’했던 도고별장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게 됐다. 그나마 아직 남아 있는 본채 건물도 언제 헐릴지 모를 처지에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 의원측 은 “도고별장은 박 전 대통령이 충남지역 시찰 때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박근혜 의원을 비롯해 가족들과는 함께 간 적이 없다. 가족들과는 주로 경남 진해에 있는 ‘저도 별장’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기자에게 말한 바 있다. 도고별장이 개인 소유인 만큼 박 의원으로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충남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대통령 별장 ‘청남대’를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월22일 ‘자의적으로’ 주민과 국민들에게 개방했다. 이에 비해 ‘도고별장’은 ‘주인’ 잃은 설움을 톡톡히 받으면서 역사의 뒤편으로 쓸쓸히 퇴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