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일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을 찾은 열린우리당 이상수 의원, 김원기 당의장, 김근태 원내대표(왼쪽부터)가 김 전 대통령에게 세배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이날 김 전 대통령 내외는 오전엔 ‘국민의 정부’ 시절 각료와 수석비서관들의 하례를 받았고, 오후에는 당시 청와대 비서들로부터 새해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틈틈이 자신의 ‘후예’나 마찬가지인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당직자들의 세배를 받기도 했다. 특히 설훈 의원 등 민주당 소속 동교동계 의원들은 DJ 대신 손님을 맞으며 ‘신년 하례식’을 주도해나가 마치 시간을 수년 전으로 되돌린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오전엔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노무현 대통령이 보낸 난 화분을 선물로 전하며 새해 인사를 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라며 답례했다. 그런데 문 실장과 유 수석은 청와대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들이 동교동 자택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의식한 탓인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오전 10시 반쯤에는 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추미애 상임중앙위원 등 당 지도부와 당직자들이 관광버스 2대를 대절해 ‘대규모 하례’를 했다. 조 대표는 세배를 마치자마자 ‘DJ 호남투어설’을 의식해서인지 김 전 대통령에게 “언제 한번 호남을 방문해주십시오”라고 운을 뗐고, 김 전 대통령은 미소로만 화답했다.
또 조 대표가 선친인 조병옥 박사의 회고록을 선물로 전하자 김 전 대통령은 “(과거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이 심했던 시절, 조병옥 박사는 구파이면서도 신파의 선봉이었던 내가 제시한 노동정책에 대해 ‘김대중이 말한 것은 중요하니까 꼭 삽입시켜라’고 말했다”고 화답했다. 추 의원은 김 전 대통령 내외에게 “더욱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간단한 인사말만 전했고, 이에 김 전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례를 대신했다.
물론 한화갑 김옥두 이윤수 설훈 의원 등 동교동 출신 의원들도 총출동했다. 이날 세배를 마친 이윤수 의원은 “김옥두나 나나 모두 (DJ의) ‘몸종’이자 ‘가방모찌’들이어서인지 아직도 우리를 애들로 보신다”며 “(DJ가) ‘지금 자네 몇 살이지’라고 물어 대답하면 ‘뭐 벌써 그렇게 됐어’라며 놀라신다”고 말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후보 경호실장을 맡기도 했던 이 의원은 또 “72년 대선 때 여기(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비서들에게) ‘차려 열중쉬어’를 시키면서 군기를 잡기도 했는데 그때가 전성기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민주당 소속 동교동계 한 의원은 김 전 대통령 내외가 세배를 받는 바로 옆 테이블에 노 대통령이 보낸 난 화분의 리본이 접혀져 있는 것을 보고 “누가 리본을 구부려 놨지. (노 대통령은) 훌륭하신 분인데, 나도 얼마 전에 (난 화분을) 받았는데 리본이 내 것만은 못한 것 같다”는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 내외는 오전부터 시작된 ‘세배 강행군’ 때문인지 세배객이 뜸하다 싶으면 잠깐씩 자택과 연결된 ‘김대중 도서관’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곤 했다.
이외에도 정대철 열린우리당 의원이 오전에 잠시 들렀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도 동교동을 방문했다. 최근 민주당에 입당한 김강자 전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은 김 전 대통령에게 “김강자 전 종암서장이 ‘입당’했습니다”라고 마치 DJ를 ‘민주당 대표’로 여기는 듯한 발언을 했다. 김 전 대통령 내외는 김한길 열린우리당 전략기획단장과 부인인 탤런트 최명길씨가 세배하러 오자 반갑게 맞기도 했다.
▲ 총선을 앞두고 DJ의 행보에 온 정치권의 관심이 쏠려있다. 사진은 지난 1일 미소지으며 세배객과 환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국회사진기자단 | ||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햇볕 정책과 대북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난 나이도 많이 먹었고, 은퇴도 했으니 여러분께 기대하고 지켜볼 작정이다”고 말해 올해 총선 출마를 준비중인 인사들에게 나름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더불어 김 전 대통령은 “성공한 인생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뜻 있게 살아서 후손들이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오늘 이 자리에는 내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낸 분들도 오셨지만, 대통령이 된 다음 알게 된 분들도 많으시다”며 “임기가 끝나고서 이렇게 많은 분들에게 인사를 받으니, 대통령이 안된 것보다는 된 것이 (훨씬) 잘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웃음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날 기자들과 오찬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나도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고 의견도 있다. 그렇지만 전직 대통령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해 지난해 2월 퇴임 이후 공식석상에선 처음으로 ‘정치 불개입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에는 열린우리당 김원기 공동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의 하례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김 의장이 90년대 초반의 여소야대 정국 시절을 화제로 꺼내자 김 전 대통령은 현재의 ‘1여3야’ 정국을 의식해서인지 “당시에도 97~98%의 안건을 여당과 합의해서 처리했고 다수의 힘을 남용하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또한 김 원내대표에게는 “김근태 의원, 남영동에서 고문당할 때 그런 고문 본 적이 없어요. 그때 부인이 살 떨어진 것 가지고 오셨는데 내가 겪어보고서 김근태라는 사람 제일 존경하게 됐어요”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DJ가 자신의 ‘정치적 중립’ 의지를 웅변하듯 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 두 사람에게 고루 ‘덕담’을 들려준 셈이다.
이날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은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세배객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일 많이 하세요”라는 덕담을 건네주며, 일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나눴다. 또한 다과회 자리에서도 목소리 톤은 다소 낮았으나, 분명한 어조로 15분 동안 연설하기도 했다.
한편 다과회에 참석한 이한동 전 총리는 ‘영입 의사를 밝힌 민주당에 입당할 것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또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부터 동시에 ‘러브 콜’을 받고 있는 박선숙 전 청와대 대변인은 향후 거취 문제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이수성 전 총리도 정치 행보를 묻는 질문에 “나라가 잘 되는 게 좋은 일”이라며 즉답을 피해갔다.
이날 김 전 대통령 자택을 찾은 각계 인사는 어림잡아 1천5백여 명. 시대도 변하고 인물도 바뀌었지만 동교동은 여전히 ‘건재’했고, 그 한가운데엔 DJ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