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전격 구속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김 전 회장의 등장 여부는 폭발성이 큰 뇌관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항간에는 지난 6월20일 귀국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당시 김 전 회장의 측근들은 “언젠가는 귀국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떤 경로로 이 같은 얘기가 불거졌는지 모르겠다”고 이를 일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김 전 회장의 귀국설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마는 걸까. 기자가 이번 귀국설의 진원지를 역으로 추적해본 결과,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적 의도이든, 개인적 의도이든, 이번 루머에는 어느 정도 김 전 회장의 ‘귀국 의지’가 상당부분 담긴 것으로 보인다.
최근 김 전 회장의 귀국설이 다시 불거진 것은 지난 6월18일. 한나라당 김영일 사무총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불쑥 김 전 회장의 조기 귀국 가능성을 언급했다. 뜻밖의 발언이었다.
김 의원은 당시 “외국에서 직접 김 전 회장을 만나고 온 사람이 전해준 것”이라고 말해, 자신의 발언에 무게를 더했다. 이 얘기가 나온 뒤 ‘해외에서 김 전 회장을 직접 접촉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관심의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김 의원측은 “아직 모든 내용을 공개하기에는 이르다”며 한발 뺐다. 그렇지만 그의 발언에는 계속 김 전 회장측과 접촉중임을 시사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김 의원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 “전직 의원이 직접 김 전 회장을 만나서 그 같은 뜻을 전해들었다고 했다. 김 의원은 그 정도 수준의 얘기만 일단 공개했을 뿐”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확인 결과 김 의원측이 공개하지 않은 전직 의원은 P씨인 것으로 밝혀졌다. P 전 의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김 전 회장을 만난 것은 사실이며, 그가 한국에 빨리 오고싶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수술 후의 경과가 그다지 좋지 않아 더이상 외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이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데다가, 본인도 한국에서 정착하며 치료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P 전 의원은 김 전 회장의 귀국의사가 건강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P 전 의원은 김 전 회장이 현재 어디에 살고 있으며, 두 사람이 만난 장소, 그리고 김 전 회장을 만나게 된 경위 등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가 아니다”며 언급을 피했다.
김 전 회장의 귀국설이 정치권에서 튀어나온 뒤 정치권과 재계의 관심은 실제 김 전 회장이 귀국하느냐 여부보다 왜 지금 이 얘기가 터져나왔느냐는 점에 쏠리고 있다.
특히 대북송금 특검이 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 구속으로 이어지면서 정치권 전체가 특검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상황에서 김 전 회장의 귀국설이 수면 위로 떠오른 부분에 대해 정치권 내부의 해석은 다양하다.
특검 수사가 확대기미를 보이는 가운데 수사기간의 연장 여부를 놓고 찬반 여론이 대립하고 있는 시점에서 야당 핵심 인사가 김 전 회장의 귀국 가능성을 언급한 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에 대한 정치권의 해석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김대중 정부의 초기 재벌정책, 대북정책과 관련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김 전 회장의 충격적 폭로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김 전 회장의 입을 통해 DJ정부의 핵심 인사들에 대한 스캔들을 끌어내 내년 총선까지 정치헤게모니를 잡아가겠다는 의도 등이다.
▲ DJ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만찬을 함께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두 번째)과 김우중 전 대우 회장(왼쪽 세 번째) | ||
그러나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에 대한 DJ정권의 지원문제에서 현대그룹에 우선 순위를 빼앗기자 갈등관계로 바뀌고 말았다. 빅딜에서도 당초 삼성자동차는 대우가, LG반도체는 현대가 넘겨받는 시나리오였지만, 결국은 반도체와 자동차 모두 현대에 넘겨주고 말았다.
쌍용자동차와 삼성자동차를 넘겨받으면서 막대한 부채를 탕감, 혹은 지불연기해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려던 김 전 회장의 시도가 무산되고 만 것이었다. 이 결과 대우는 빅딜이 무산된 지 1년 만에 무너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김 전 회장의 증언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재계 전체를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을 수 있는 뇌관이 될 수 있다. 박지원 전 장관 등 DJ정부 핵심 인사들이 구속되고는 있지만 특검 수사는 현 상황에서 태생적으로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현대와 DJ정부 인사들, 그리고 청와대가 입을 다물거나 일정 수준에서 대북송금 문제를 덮으면 특검 수사는 더이상 진척되기 힘든다. 야당의 우려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특검 수사를 통해 전·현 정권에 결정적 타격을 줄 것으로 기대하는 정치적 의도가 무산될 수 있기 때문.
사실 김 전 회장의 귀국문제는 야당에게만 유리한 부분은 아니다. 청와대 등 현 집권세력에게도 김 전 회장의 귀국은 중요하다. 김 전 회장의 폭로내용에 따라 현 여당의 상당수 인사에게 타격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신당 창당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고, 정치권 물갈이도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우중 전 회장의 귀국문제에 대해 P 전 의원이 발벗고 뛰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얘기.
지난 대선 이후 김 전 회장의 귀국설은 서너 차례나 제기됐다. 특히 김 전 회장은 미 경제주간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권유로 출국했다”는 발언을 해 그의 장기 해외도피에 김대중-김우중 양자의 밀약이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올 초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김 전 회장이 귀국할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있게 나돌았다. 특히 한나라당에서 김 전 회장의 귀국을 바라고 있는 형편이다. 그가 입을 열 경우 DJ정권에게 엄청난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현재 독일의 한 병원에서 요양중인 것으로 알려진 김 전 회장 역시 귀국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 빙모상 때 홀로 귀국한 부인 정희자씨가 국내 분위기를 체크하고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문제는 김 전 회장과 대북송금 특검과의 상관관계이다. 특검 정국을 조기에 마무리지으려는 여권과 이에 반대하는 입장인 야당과의 대립 구도 속에 김 전 회장도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김 전 회장측에서는 “김 전 회장의 귀국이 민감한 정치 문제에 개입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야당측의 꾸준한 접촉 시도와 여권의 귀국 시기 조율 움직임을 은연중 빗댄 표현으로 보인다.
항간에는 김 전 회장이 정치권과 대략적인 수준이나마 사전에 입장 정리가 된 뒤에 들어올 것이라는 얘기에 비중이 실리고 있다. 그 시기는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최근 정가 일각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