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깡패가 득세하던 50년대에는 유지광의 ‘삼우회’와 이화룡의 ‘명동파’가 맞서 있었다. 이정재 임화수의 사형으로 삼우회가 몰락한 이후 60년대 서울에는 명동을 중심으로 한 ‘신상사파’가 패권을 장악했다. 이화룡의 뒤를 이은 신상현이 보스였다. 여기에 도전한 새로운 그룹이 바로 지방에서 상경한 ‘호남파’였다.
60년대 당시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에서는 ‘대호파’와 ‘동아파’가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대호파와의 패권 다툼에서 패한 동아파는 보스 전아무개씨가 은퇴하고 조직은 분해된다. 동아파의 일원이었던 조양은은 일찌감치 상경해서 호남파의 오종철 밑으로 들어갔고, 뒤이어 역시 동아파의 중간보스였던 박종석(일명 번개)과 행동대장 김태촌이 서울로 올라왔다. 1975년 호남파는 조폭사의 첫 물줄기를 바꾼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으로 신상사파를 무너뜨리고 본격적으로 중앙 무대의 패권을 잡기 시작했다.
당시 호남파는 오종철파와 번개파로 나뉘었고, 각각의 중간보스였던 라이벌 조양은과 김태촌이 70년대 들어 선배들의 뒤를 이어 조직의 보스가 되면서 본격적인 전쟁을 벌인다. 김태촌이 먼저 76년 광주 동아파 세력들을 규합하여 서방파를 만들자, 조양은도 뒤이어 78년 광주 순천 목포 등 지방 조직까지 규합한 양은이파를 조직했다.
한편 광주의 패권을 장악한 대호파는 구OB파와 신OB파로 나뉘었는데, 신OB파의 이동재가 살인미수혐의로 서울로 피신와 중앙에서 조직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70년대 말 형성된 것이 ‘3대 패밀리’이다. 이때부터 서울의 밤세계는 호남, 그것도 광주 주먹이 장악하게 된다.
80년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도 역시 삼청교육대를 통해 깡패 소탕 작전을 펼쳤으나, 사실 조폭들의 전성시대는 80년대였다. 유흥산업의 엄청난 증대와 야간통행금지 해제 등으로 서울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한 유흥업소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조폭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때 전국의 주먹들이 ‘먹이’를 찾아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1975년 호남세력은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으로 신상사파를 무너뜨리고 서울 암흑가의 패권을 잡았다. 사진은 조양은씨 주연의 영화 <보스>의 한 장면. | ||
이외에도 대전의 진술파, 옥태파, 부산의 신칠성파, 신20세기파, 광주의 국제PJ파, 인천의 꼴망파, 수원의 수원파 등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호남 주먹이 워낙 득세한 까닭에 상대적으로 영남 주먹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영남에서 가장 위세를 부린 조폭은 칠성파였다. 부산에서만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칠성파는 이강환씨가 보스로 현재까지 그 조직이 잔존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신칠성파 영도파 등은 모두 칠성파에서 떨어져 나간 조직이다. 이씨는 화랑신우회라는 조직을 결성, 부산뿐만 아니라 마산 진해 심지어는 광주와 수원 지역의 조직까지 연계하는 전국적 규모를 꿈꾸기도 했다. 부산에서 칠성파에 맞선 조직은 20세기파였다.
이처럼 지방은 대개 두 개의 조직이 서로 필생의 라이벌로서 세력 다툼을 벌이는 양상이 흔하다. 대구 지역에서는 향촌동파와 동성로파가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전북 전주는 월드컵파와 나이트파가 전쟁을 치렀다. 이밖에도 수원은 남문파와 북문파가, 청주는 시라소니파와 파라다이스파가 각각 맞서는 형국이었다.
90년 범죄와의 전쟁은 일단 외형상 확장일로에 있던 조폭의 비대화를 막았다. 이때 보스급만 30여 명이 구속되는 등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조폭의 와해가 잇따랐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보스 및 중간보스급 조폭들이 속속 출감하면서 조폭 문화가 서서히 변하고 있다. 이들은 일단 외형상 손을 씻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10~30명의 소규모 단위로 재개발, 건설업, 금융업, 벤처기업 등 새로운 사업 등에 관여하면서 그 이권을 챙기려 한다.
조폭은 50~60년대의 ‘주먹 시대’와 70~80년대의 ‘사시미(생선회)칼 시대’를 지나 일명 21세기 ‘벤처형’ 조폭으로 세번째 변신을 꾀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