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정동영 열린우리당 신임 당의장이 연설을 하면서 주먹을 번쩍 들어올리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정동영 신임 의장이 차기 대권주자 이미지를 내세워 일찍부터 ‘대세론’을 외쳐오긴 했지만 ‘영남대표론’이나 일부 주자들 간의 합종연횡설 등이 불거지면서 잠시 독주 전선이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 신임 의장이 ‘우려’를 씻어내고 압도적 1위를 차지한 데 대해 당내에선 “노무현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이른바 ‘노심’이 작용해 정 신임 의장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실한 1위로 등극할 수 있었다는 시각이다.
당초 노 대통령의 의중은 영남권 후보들에 실리는 듯 보였다. 노 대통령과 ‘코드가 가장 잘 맞는다는’ 영남 출신의 김두관 전 장관이 김혁규 전 지사 영입을 위해 물밑작업을 주도했고 노 대통령 핵심측근인 이강철 당 상임중앙위원이 김혁규 전 지사의 당의장 출마에 노골적으로 나섰을 정도였다.
영남 주자인 김정길 전 장관도 김혁규 전 지사의 입당을 미리부터 전해듣고 당의장 경선 밑그림을 짰을 정도로 청와대가 영남권 후보들에 들인 ‘정성’은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김근태 원내대표의 당의장 출마가 불발되면서 경선 흥행 요소가 떨어진 것을 만회하고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당을 주도해온 정동영 의원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예비 경선 이후 유일한 영남후보가 된 김정길 전 장관측은 내심 같은 영남권 인사들의 전폭적 지원을 기대하며 ‘정동영 뛰어넘기’에 자신감을 보였다. 평소 김혁규 전 지사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고 김두관 전 장관도 총선 발판을 위해 영남대표론을 지지할 것으로 믿었다. 이강철 위원과도 몇 차례 만남을 가진 후 “영남 인사들이 도와줄 것으로 믿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김 전 장관은 4위에 그쳐 새 당 지도부 안에 들어가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전체 투표 인단 1만1천여 명 중 35%에 달하는 영남권 대의원들의 확실한 표몰이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징후는 전당대회 며칠 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이즈음 각 후보 진영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김 전 장관은 이미 4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됐었다.
▲ 열린우리당 전당대회가 있던 지난 11일 노무현 대통령 내외는 북한산을 올랐다. 청와대사진 기자단 | ||
전당대회 전날 한 후보측 인사는 “영남권 표가 김정길 전 장관 진영으로 몰리지 않고 오히려 정동영 후보에게 지지세가 몰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인사는 “영남권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노 대통령 측근인 이강철 위원이 정동영 후보 당선을 위해 뛰고 있다”고 밝혔다.
다른 후보 진영에서도 ‘이강철 위원이 정동영 후보를 지원한다’고 보고 있었다. 전체 투표인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영남권에서 정동영 의장에 대한 ‘표몰이’가 이뤄질 것이란 예측이었다.
이강철 위원은 “당의장 경선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혀왔지만 이미 여러 당권 주자들은 이 위원의 정동영 후보 지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후보측은 “이강철씨를 비롯해 염동연씨도 연청 사무총장 출신 전력을 바탕으로 전남 지역에서 정동영 후보를 위해 운동한다더라”며 “이 정도면 노 대통령 의중이 이미 정동영 후보에게 실린 것 아니겠나”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반영한다는 평을 듣는 이강철 위원이 정동영 신임 의장의 당선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 측근들이 영남대표론에 불을 지폈지만 ‘히든카드’로 알려졌던 김혁규 전 지사의 불출마 이후 영남대표론은 크게 힘을 받지 못했다. 박빙 승부로 인한 흥행이 아예 어렵다면 차라리 확실한 1위를 만들어 주는 게 나은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최대 표밭인 영남권을 흔들어 특정 후보를 지지해도 정동영 후보의 1위를 위협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줘 당 안팎에서 확실하게 인정받는 1위 주자로 만드는 게 총선을 위해서도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노 대통령이 당을 쥐고 흔들어온 정동영 의원을 다소 부담스럽게 여겼을지 모르지만 이번에 노 대통령 측근들이 정 의원을 밀어줘서 확실한 1위를 차지한 모양새가 됐으니 당 운영에 노 대통령의 입김이 전보다 많이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최근 정치권에 불어닥친 ‘물갈이 바람’에 대한 고려도 노 대통령측의 정동영 후보에 대한 측면 지지를 부추겼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지지부진할 것 같았던 한나라당의 물갈이 작업이 중진의원의 출마 포기 선언과 오세훈 의원의 불출마 선언으로 힘을 받았다”며 “그러나 ‘젊은 주자’인 정동영 후보가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돼 당 전면에 나서면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 맞각을 들이댄다면 한나라당이 내세울 유일한 정치개혁 성과인 당내 물갈이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을 것”이라 밝혔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도 “지금껏 대선자금 이슈 등을 통해 노 대통령이 사실상 혼자서 한나라당을 상대해왔지만 이젠 정동영 신임 의장이 그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해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동영 신임 의장은 당선 직후 인터뷰에서 “총선에서 승리하면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동영 신임 의장측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출입기자들의 휴대폰에 ‘압도적 지지만이 총선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호 3번 정동영’이란 문자 메시지를 날려왔다. 이미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내 당의장에 선출된 그가 과연 ‘총선 승리’라는 다음 과제를 이뤄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또 입당이 예상되는 노 대통령과 향후 어떤 ‘궁합’을 보일지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