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최씨는 지난 1999년 7월부터 지난 7월7일까지 외국계 은행인 N사의 서울지점에서 근무했다. 그는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금융학을 전공한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밝혀졌다.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냈던 재벌 2세인 또 다른 이아무개씨를 통해 지난 2001년 12월 초에 피해자 이씨를 만나게 된다. 재벌 2·3세들의 사교클럽인 ‘베스트’의 한 모임 자리에서였다. 최씨는 사교클럽 회원들로부터 ‘금융전문가’ ‘재테크의 달인’ 등으로 통했다고 한다.
피해자 이씨는 학교법인 S학원 이사장이자 S기업 대주주의 아들. 최씨가 이씨를 처음 알게 될 당시 이씨는 S기업과 자신의 집안 자금 수백억원을 관리하고 있었고, 이 막대한 자금을 예치할 만한 곳을 물색하고 있던 차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피의자 최씨가 ‘검은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던 것.
최씨는 이씨에게 “매우 안전하고 원리금 상환이 확실히 보장되는 N은행 정기예금 상품을 이용해 자금을 관리해주겠다”고 꼬드겼다. 그러면서 “N은행은 다른 은행들보다 금리가 높은 편이고, 1년에 2∼3회 정도 고객들을 위해 특별우대금리를 준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최씨는 이씨의 막대한 돈을 가로챌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구속 영장에 따르면, 최씨에게 속은 이씨는 2001년 12월7일, 최씨의 은행 사무실에서 정기예금 예탁금 명목으로 70억원을 건넸다. 그때부터 최씨의 사기 행각은 시작됐다.
최씨는 지난 4월24일까지 무려 15회에 걸쳐 7백45억을 받아 편취했던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다. 물론 이씨에게 건네 받은 돈은 모두 최씨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은행에는 단 한푼도 예치시키지 않았던 것.
그러면 피해자 이씨는 무엇을 믿고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거액을 최씨에게 건넨 것일까. 최씨는 이씨에게 돈을 받을 때마다 정교하게 위조한 가짜 정기예금증서와 약속어음 증서를 건네줬다. 이 위조 증서는 최씨가 서울 무교동의 한 인쇄업체에 의뢰해 조작한 것. 이렇게 위조된 것만 정기예금증서 21장과 약속어음 9장. 이 가짜 증서를 믿고 이씨는 아무런 의심없이 돈을 맡겼다.
피의자 최씨는 “이씨에게 받은 돈 전액을 홍콩 펀드매니저인 ‘스티븐 유’에게 투자했는데, 그가 돈을 가지고 도주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최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최씨가 말하는 ‘스티븐 유’는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씨가 구속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또 다른 사기 피해자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재벌 자제들과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4∼5명이 검찰에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리는 전화를 건 것. 이들도 모두 사교클럽 ‘베스트’ 멤버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최씨를 사기혐의로 고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최씨를 고소하면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될까봐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설명. 검찰은 피해자들에게 최씨를 정식으로 고소할 것을 설득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들이 최씨를 고소하면 적어도 1백억원 이상 피해액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최씨를 고소할지는 미지수다. ‘그까짓 돈 찾지 못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검찰 안팎에서 들린다. 그렇지 않고서야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을 사기당한 사람들이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선뜻 나서길 꺼리고 있다. 이는 이들의 재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검찰 관계자는 “수천만원을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해 매일같이 시위하는 굿모닝시티 분양 계약자들과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다”라며 뼈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