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건물 | ||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을 이번 대법관 인사에 반영해달라’는 요구와 ‘기존의 인사틀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대법관 인사를 시행하겠다’는 입장 간의 다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들로 인해 ‘판사는 판결로서만 말한다’는 법원의 오랜 원칙은 이 시점에서만큼은 자취를 감추고 공론을 위한 ‘판결 밖으로’의 과감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제기된 ‘마피아’ 설을 처음 제기한 인물은 그동안 끊임없이 사법부 개혁을 주장해온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 그는 지난 12일 법원 내부 통신망에 “우리나라 법관인사시스템은 비민주적이고 위헌적이며 국민의 신뢰를 얻기에 한계가 있다”고 비난하며 “개혁 주장을 곡해하고 소수의 주장으로 폄하하려 들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자들이 ‘마피아’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거부하는 기득권 세력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우리 사법부 안에서 ‘마피아’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판결을 하는 판사가 잠시 재판에서 물러나 법원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법원행정처에 재직한 경험이 있거나 사람의 목숨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형사 단독 재판장 출신들을 ‘법원행정처 마피아’, ‘형사단독 마피아’로 부르곤 했다.
두 직책 모두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수료 성적이 우수한 법관들이 갈 수 있다는 점, 연줄이 작용한다는 선입관 등에 의해 요직으로 일컬어졌고 이 자리를 거치지 못한 판사들에 의해 ‘마피아’라고 이름붙여진 것이다.
▲ 최종영 대법원장 | ||
이런 마피아 논쟁과 맞물려 9월에 있을 신임 대법관 인사 한 자리를 놓고 ‘개혁’을 주장하는 소장 판사들과 이들에 의해 ‘보수’로 이름 붙여진 최종영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 수장들간의 입장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일부 언론을 통해 대법관 제청 후보 대상자 3명의 명단이 공개된 후 대법관제청 자문위원인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이 위원회 소집일 퇴장, 사임서를 제출한 데 이어 현직 부장판사 한 명이 인사 관행을 비판하며 사직서를 제출하고 1백44명의 판사들이 연명장 형식의 반대 의견을 대법원장에게 제출한 것이다.
법원 내부의 불만도 고조됐다.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13일 ‘법관 사직의 변’이라는 글을 통해 “최근 모습을 드러낸 새 대법관 선임의 내용은 종전과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고 평가하고 “이런 모든 결과에 대해선 18년여간 법관으로 몸담아 온 나 자신 역시 책임을 벗어날 수 없고 그동안의 비겁한 타협과 안일한 외면, 무책임한 침묵에 대해 자괴감과 죄송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이번 인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에 북부지원 이용구 판사가 법원 통신망인 코트넷에 대법원장의 재고를 촉구하는 의견서를 올리며 전국의 법관들에게 동참을 호소, 다음날인 14일 오후 1백44명의 전국 법관들이 서명한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이들은 이번 사태가 그동안 ‘밀실인사’로 비난받아온 대법원의 서열 중시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에 사법부 구성원들의 입장 역시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법원행정처다. 이강국 법원행정처장은 박 부장판사가 사직서를 제출한 13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후보자에 대한 불만이 있다고 해서 자문위원회 회의장에서 중도에 퇴장하고 위원직을 사퇴한 것은 자신이 법조 관련 직역 대표자라는 책임감을 망각한 적절치 않은 행동”이라며 자문위원직을 사퇴한 강 장관과 박 협회장을 비난했다.
▲ 지난 13일 대법관 인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사직 서를 제출한 서울지법 박시환 부장판사. 임준 선 기자 | ||
그는 “조만간 있을 한대현 헌법재판관 후임 인선에서는 대법원과는 다른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을 중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히 대변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인지를 기준으로 삼을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이에 임희동·유재복 판사도 같은 취지에서 “영웅주의나 돌출행위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모든 분쟁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게 법관의 사명”이라며 점진적인 변화를 주장했다.
반면 광주지법 정진경 부장판사는 “이번 사건은 대법원이 얼마나 국민과 일반 법관의 의사에 무관심한 유아독존의 기관인지를 드러낸 사건이며, 사법부 자체에 의한 개혁은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정 부장은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는 조직은 개혁당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지법 박재완 판사도 “대법원은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려고 하고 있다”며 “박시환 부장판사의 희생과 헌신이 정말 보잘 것 없는 제물로 끝나지 않고 새롭고 자랑스런 사법부의 탄생에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마피아’ 갈등에서부터 판사들의 ‘연명장’ 사건은 진화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대법관 임명의 열쇠를 지고 있는 현재 청와대의 입장이 기존의 인사관행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을 수용하기에는 녹록지 않아 보인다는 점과 연명장에 동참한 판사들이 급기야 ‘집단 사퇴’라는 강경입장을 취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대법원도 현재 공개된 세 명의 후보 외에 제3의 인물을 대법관 후보로 거론하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명단이 공개된 이후 3명의 후보 중에 한 명을 선택하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현재까지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판사들이 개혁파들이 요구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감내해 낼 것이냐도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부 갈등이 확산되자 위기를 느낀 대법원이 18일 오후 3시 사상 처음 전국 법관대표회의인 ‘전국 판사와의 대화’를 소집해 대법관 제청 파문을 둘러싼 내부 의견 수렴에 들어갔으나 사태 수습보다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판론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이날 회의도중 자리를 나온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회의에서 판사 10명 가운데 5명꼴로 회의 소집 절차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했다”며 “일부 판사들의 경우 오늘 오전이 되어서야 회의 소집을 이메일로 통보받았다고 하는 등 법관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마련했다는 취지와는 달리 절차부터 비민주적인 잘못된 회의”라고 주장했다.
지정우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