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대표가 대전에서 펼쳤던 합동 거리유세 장면. | ||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젊은 층의 막강한 지지를 바탕으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57만 표(2.3%) 차이로 힘겹게 누르며 청와대에 입성했다. 극적인 승리였던 것만큼 그 뒷면에는 당시로서는 밝히지 못하는 많은 비화들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대선 과정의 비화를 묶은 책이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SBS 대기자 엄광석 국장은 최근 출간한 <대선음모>(도서출판 청어)를 통해 당시 대선 전후의 민감한 문제를 짚어보고 있다.
여기에는 DJ가 이회창 후보에게 여러 번 추파를 던졌지만 실패해 결국 ‘창 죽이기’를 시작했다는 의혹과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를 저지하기 위해 직접 밤 늦게 현대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이야기 등의 논란을 부를 만한 핫이슈가 담겨 있다. 시계를 1년 전으로 되돌려 책 갈피에 끼어 있는 그때의 숨은 이야기 몇 장면을 들춰본다.
한나라당의 당직자들은 지금도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의 ‘정치공작’에 대해 치를 떨고 있다. 이회창 후보의 특보였던 이종구씨는 특히 ‘병풍조작’이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했다고 믿고 있다.
“검찰이 김대업을 불러 자료를 만들면 천용택 등이 각색하여 정치적 공세를 폈고, 이것을 그대로 신문을 만들어 지하철에 뿌렸다. 전문가의 증언이라면서 찍어대니 순진한 시민들은 그대로 믿는 것이다. 이회창 대선 캠프의 에너지 80%가 김대업에게 빼앗겼다. 허구한 날 김대업이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반대 증거를 찾아대느라 진이 빠질 정도였다.”
병풍 정국에만 매달려 선거다운 선거 한번 치르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했다는 한나라당측의 ‘억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왜 DJ 정권이 그토록 ‘이회창 죽이기’를 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엄 대기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이원창 의원의 말을 빌려 풀어내고 있다.
“DJ는 여러 번 이회창 후보에게 추파를 던졌다. 박지원을 통해서도 여러 번 추파를 전해왔다. DJ는 국민의 불신이 높은 가운데 명예스럽게 탈출하는 것은 오직 남북대화를 통해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현직 대통령이 야당 후보에게 이런 추파를 던지면 받아들여야하는 것인데…. 이회창 후보는 완고한 외고집으로 이를 거절했다.”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대통령과의 마지막 영수회담에서 깐깐한 자신의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내고야 만다. DJ의 추파를 거절한 이 후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DJ가 안내하던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눈에 쌍심지를 켠 채 계단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 후보의 이런 ‘무시무시한’ 모습을 지켜보던 DJ는 속으로 조용히 결심했다고 한다.
‘저 친구가 대통령이 되면 나의 여생은 없다.’
이때부터 DJ는 작심하고 이회창 죽이기 음모를 시작했다는 것이 이 후보 측근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한나라당의 ‘창’ 죽이기 음모 시각에 대해 당시 청와대는 어떻게 생각할까.
2002년 1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을 역임했던 조순용씨는 이에 대해 “정무수석으로 있을 동안 이회창 후보의 측근들에게 여러 차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DJ를 잘 모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큰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는 이런 말을 듣지 않았다. 만일 이 후보가 이런 말의 뜻을 알아들었더라면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조 당시 수석의 말은 ‘이 후보가 눈 딱 감고 DJ를 한 번만 봐주었더라면 대통령이 거뜬히 될 수도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회창 후보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DJ를 잘 봐달라는 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아들들의 비리를 감싸달라는 말 아닌가. 또한 정권 비리를 파헤치는 데 있어 적당히 눈을 감는 것은 야합인데 어떻게 야당이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죽어도 고개를 숙이거나 타협하지는 않겠다’는 당시 이회창 캠프의 기류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나라당은 대선 한 달을 남기고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가 성사되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당직자들은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정가 주변에서는 한나라당이 노-정 후보 단일화를 방해하기 위해 뛰고 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중진이었던 이부영 의원은 이에 대해 “단일화를 막기 위해 당에서는 여러 번 전략회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단일화 소식이 들려오자 정몽준 캠프를 집중적으로 접촉해 단일화를 못하도록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정씨 가문을 이회창 후보가 직접 접촉했다는 얘기도 있다. 후보 자신이 뛰니까 다른 사람들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회창 후보는 지방에 가야 하는데도 밤늦게 현대가의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 이회창 전 대표가 16대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정계은퇴선언 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 ||
“이부영이 아웃사이더였으나 당의 중진이어서 가끔 중진을 모아놓고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이 후보가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후보가 직접 뛰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후보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원창 의원은 또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단일화를 방해하기 위해 이회창 후보가 나선 것이 아니라 종교계가 발 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단일화를 방해하기 위해 직접 뛰었다는 얘기는 모르겠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많이 뛴 것은 사실이다. 즉 노무현 후보는 좌파 성향으로 신을 부정하는 세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와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이 뭉쳐 정몽준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럴 때마다 정몽준은 좌고우면했다”고 전했다.
단일화가 이루어지자 정몽준 캠프에서는 단일화 약속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같이 유세를 하는 것에는 난색을 표명했다. 하지만 노무현 캠프에서는 본격적으로 선거공조를 하자는 입장이었다.
정종문 보좌관은 이에 대해 “MJ(정몽준)는 선거 공조 협상을 하자는 민주당의 제의에 대해 1주일 동안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당내에서 ‘합의문에 지는 편에서 선거 사무장이 된다는 약속이 있으니 선거공조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책위 의장이었던 전성철 박사가 협상을 맡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선거 공조의 협상 과정 중 ‘권력의 나눔’ 문제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정 후보측은 ‘권력 분점’을 문서로 하지 않는 대신 ‘노 후보가 유세 때나 TV를 통해 이런 내용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면 믿겠다’고 노 후보측에 통보했다. 하지만 노 후보측은 즉답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MJ도 노 후보와 일체 연락을 끊었다. 선거 공조가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정종문 보좌관은 그 뒤의 긴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양측이 며칠 동안 일체의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노 후보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가 두 번이나 MJ의 부인인 김영명 여사를 찾아 왔지만 만나주지 않았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노 후보와 매우 절친한 강릉의 최욱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거 열흘 전이었다. 최욱철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노 후보가 MJ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도 MJ에게 이제는 ‘리턴콜’을 하라고 건의했다. MJ가 전화를 하니까 마침 회의 중이라 5분 후에 전화를 하겠다고 하더니 1분도 안 돼서 노 후보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때 노 후보가 MJ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반갑다고 하면서 만나보자고 하여, 이튿날 의사당에서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선거 공조, 다시 말해서 대선 일주일을 남겨놓고 시작한 합동 유세는 이렇게 타결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성사된 공조도 투표 1시간 30분여를 남겨 놓고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끝나게 된다.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전격 철회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