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기념일 직후 여성들이 즐겨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진품 명품 쇼’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최근의 ‘능력남’ 트렌드는 값비싸고 시크한 명품 선물을 고르는 안목과 그것을 구매하는 재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뻔한 월급쟁이들의 재정상태를 감안해 볼 때 명품 선물은 큰 맘 먹지 않는 이상 살 수 없는 ‘그들만의 선물’이다. ‘명품 선물 스트레스’를 앓고 있는 가련한 요즘 남자들의 애환을 들여다봤다.
연인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선물을 부담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심사숙고해서 고른 선물이 남들과 비교당해 안하느니만 못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하고 심지어 관계가 파탄 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성들이 겪는 선물 스트레스는 더욱 심각했다. 명품을 선물하지 못하면 ‘무능력자’로 찍히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 돈을 마련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첫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가 두렵다는 김 아무개 씨(27). 그는 입대 직전 여자친구를 처음 사귀게 됐는데 정말 사랑한 나머지 자타공인 ‘여친 바보’로 불렸다. 애인이 원하는 게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뭐든 들어줬던 것인데 문제는 입대 후 발생했다.
김 씨의 연인은 그의 빈자리를 선물로 채우려 했다.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이별을 선언할 것 같아 김 씨는 입대 직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둔 돈 200여만 원을 모두 선물 값으로 썼다. 모자란 돈은 몇 푼 되지도 않는 군인 월급으로 채웠으며 그래도 부족할 땐 휴가 때마다 막노동까지 해가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요구는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먼저 지친 건 남친 김 씨였다. 그는 “처음엔 능력껏 선물하고 여자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에 나도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번에 실망시키면 이제껏 해준 게 다 물거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계속 값비싼 선물을 하게 되더라”며 “그런데 결국 내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 휴가 마지막 날에서야 얼굴을 보여주며 선물만 쏙 받아가던 여자친구는 이별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 충격을 받았다. 그 뒤론 이런 ‘백셔틀’(빵셔틀과 유사한 의미로 백을 억지로 사오라고 시키는 행위)이 되풀이될까봐 여자친구를 못 만나겠다”고 털어놨다.
김 씨와 같은 ‘명품 선물 스트레스’는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명품 선물’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아 결국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타깃은 가족의 물건. 부모님이나 나이 많은 형제들의 액세서리, 의류, 화장품, 가방 등을 훔쳐 선물하는 것이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범죄의 길로 빠져든다. 지난해에는 20대 청년이 100일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 강도짓을 벌이다 경찰에 붙잡힌 사례가 있었다. 2012년엔 40대 노총각이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주려 무려 1년 동안 1700만 원 상당의 맥주를 상습적으로 훔치다 철창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들처럼 무리를 해서라도 명품을 선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남성들은 자기가 속한 그룹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여자친구에게 명품 선물을 한다. 자신을 꾸미는 것을 넘어 여자친구에게도 값비싼 선물을 할 줄 아는 ‘능력 있는 남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다. 일종의 과시욕인 셈인데 이런 경우엔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기를 쓰고 명품을 선물하려 한다. 간혹 자신의 외모보다 뛰어난 여성을 명품으로 꼬드겨 관심을 받고자하는 남성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명품을 선물한다고 말했다.
요즘엔 아무리 본인이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도 주변에서 평이 좋지 않으면 그 선물은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고심 끝에 선물을 해주고도 연인의 친구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평을 받았다면 그건 안주느니만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특히 여성 사이에서 이런 묘한 경쟁심이 심하다. 때문에 남자들은 기념일이 다가오면 연인은 물론이고 그의 친구들까지 만족시킬 만한 선물을 고르느라 머리를 쥐어짠다. 그러다 보면 결국 값비싼 명품이 해답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잘 만나던 남자친구와 최근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이 아무개 씨(여30)가 딱 ‘명품 선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커플의 전형이다. 이 씨는 요즘 심기가 불편한데 얼마 전 저녁식사 자리에 친구가 들고 나온 가방을 본 뒤로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연애를 시작한 지 100일도 지나지 않아 생일선물이라며 260만 원대의 명품 가방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친구의 연인은 이 씨의 남자 친구와 동갑에 직업도 같다. 그런데 이 씨는 2년 넘게 만나는 동안 국내 브랜드에서 50만 원 남짓한 가방을 선물 받은 게 최고가였다. 그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자꾸 비교가 되고 초라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남자 친구에게 사실대로 마음을 털어놨지만 “너도, 친구도, 그 남자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만 돌아와 서운함만 더했다.
간혹 이별을 위해 명품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올해 초 연인과 2주년 기념일을 앞둔 최 아무개 씨(32)는 거창한 파티를 계획함과 동시에 이별을 준비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결혼 적령기에 들어섰을 때 명품 선물 안 해주고 헤어지면 뒷말이 나온다”는 말이 들려왔다. 결혼을 앞두고 여러 가지 뒷말이 나온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헤어질 때도 ‘굿바이’를 해야 그런 뒷말도 잠재울 수 있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최 씨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미래’를 생각해 결국 평소 여자 친구가 갖고 싶다던 200만 원 상당의 명품 가방을 구입하고 말았다.
2주년 기념일에 맞춰 고급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케이크 촛불도 끈 후 최 씨는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예상대로 여자 친구의 반응은 최고였다. 기뻐하는 여자 친구에 최 씨는 “이런 선물 다시는 못해 줄 것 같다. 마지막 이별 선물이다. 헤어지자”고 말했다.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여자 친구는 이내 덤덤히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인으로부터 “전 여자 친구가 너보고 참 매너가 있다더라. 좋게 헤어졌나봐”라는 말을 듣곤 알 수 없는 안도감에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명품 선물이 연인들의 마지막 입막음을 위한 ‘위로금’이 돼버린 것이다.
이처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명품을 선물하는 사람이 늘면서 이로 인해 이색적인 풍경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각종 기념일 직후 여성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에서 벌어지는 ‘진품명품 쇼’가 대표적이다. “남자친구에게 가방을 선물 받았는데 진품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글과 함께 자세한 사진들이 올라오는 것인데 이런 게시물엔 전문가를 자청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수십 개씩 달린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올린 댓글은 앞으로의 연인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과거 연상의 애인으로부터 명품 가방을 받았던 김 아무개 씨(여28)는 “만난 지 1년쯤 됐을 무렵 생일선물로 100만 원이 넘는 명품 가방을 사왔더라. 나도 사람인지라 받을 땐 좋았는데 나중에 수선을 맡기려고 알아보니 가품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직접 따지자니 서로 민망할 게 뻔하고 그 뒤로 사이가 서먹해진 건 사실이다. 명품은 받아도 스트레스고 안 받아도 스트레스다”고 말했다.
심지어 명품 선물을 위해 계까지 만든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박 아무개 씨(26)는 친구들 사이에서 전당포로 불린다.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박 씨로부터 돈을 빌리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박 씨를 찾는 이유는 몇 되지 않는다. 연인과의 기념일이거나 ‘사고’를 쳤거나 둘 중 하나다.
돈을 빌리고 갚는 형태도 다양하다. 목돈을 한꺼번에 빌린 뒤 아르바이트 월급 통장을 박 씨로 해두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여러 명을 모아 계를 만들기도 한다. 기념일이 가장 빠른 한 명에게 박 씨가 돈을 주고 그 뒤부턴 계원들이 원금과 이자를 할당하는 방식이다. 박 씨에게 돈을 빌리는 친구 중 누구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위해, 누구는 미모의 여자 친구를 사수하기 위해 매월 곗돈을 보낸다고 한다. ‘등골 브레이커’가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요즘 남자들은 성인이 돼서도 명품 선물을 사기 위해 등골 브레이커가 돼 간다. 불쌍한 일이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