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이계 전직 의원은 최근 사석에서 소위 박심(朴心·박근혜 대통령의 마음) 논란에 대해 “마른 장작에서 연기가 날 리가 있느냐”면서 이같이 말했다. 6·4 지방선거 광역단체장 출마자들의 교통정리와 ‘대진표’ 확정, 당대표·원내대표 후보군 정리 등 여당의 물밑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대한 움직임들에서 뭔가 기획되고 조정된 듯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평가였다. 이 인사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보통 BH(청와대)의 입김이 선거판에 작용할 때에는 무질서 속의 질서, 다시 말해 얼핏 보기엔 무질서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미심장한 흐름이 있는 양상을 띤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 질서정연하다. 누가 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유정복 장관(왼쪽)이 인천시장 선거 출마 선언을 하자 ‘박심’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사진제공=청와대
청와대는 ‘박심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새누리당 내에서 광역단체장 후보군이 정리돼 가는 일련의 과정을 되짚어 보면 이런 평가가 결코 과하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움직임은 지난 2월 9일 친박계 4선 중진인 정갑윤 의원이 돌연 울산시장 선거 출마를 포기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정 의원은 출마를 선언한 지 불과 13일 만에 자신의 말을 뒤집는 기자회견을 열고 “중앙정치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곧 이어 친이계로 분류되는 김기현 의원이 울산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당내에서는 정 의원의 출마 포기를 두고 “친박계 독식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카드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3월로 접어들면서 박심과 연결되는 흐름은 한층 뚜렷해지고 가속도가 붙었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여겨지는 유정복 전 안전행정부 장관이 3월 3일 갑작스럽게 휴가를 떠나더니 이틀 뒤인 3월 5일 인천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개각설이 불거질 때마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신경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해 왔던 터라 유 전 장관의 출마 선언은 박심 논란을 증폭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더욱이 이미 인천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던 친박계 이학재 의원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유 전 장관 지지를 선언하며 출마의사를 접었다. 이 의원은 정갑윤 의원과 함께 지난 1월 박 대통령의 인도·스위스 순방에 동행했던 인물. 어찌 보면 ‘박심 마케팅’을 해왔다고 볼 수도 있는 그가 맥없이 주저앉자 역시 인천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안상수 전 시장은 “본인(이 의원)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 어떤 압력이나 보이지 않는 조정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고 밝혔다.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김황식 전 국무총리. 최준필 기자
3월 5일 경기지사 선거 구도에도 변화가 왔다. 연초부터 불었던 ‘중진차출론’에 끄떡도 하지 않았던 남경필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전에 뛰어든 것이다. 새누리당 경기지사 경쟁에는 정병국·원유철 의원과 김영선 전 의원이 이미 발을 담근 상태였지만 “고만고만한 후보만 넘쳐난다”는 비아냥대는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남 의원의 가세로 새누리당 경기지사 경선이 흥행몰이를 위한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3월 14일에는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귀국하면서 서울시장 후보 출마를 공식화했다. 정몽준 의원과 이혜훈 최고위원, 거물급 인사들이 이미 표밭을 갈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김 전 총리는 “역전 굿바이 히트를 치겠다”는 귀국일성이 보여주듯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김 전 총리는 친박계 이성헌 전 의원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언론 인터뷰에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의 친분을 거듭 부각시켰다. 선거 전 김 실장과 이런 저런 상의를 했다는 자신의 발언이 논란이 됐는데,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김 실장과 집안끼리도 가까울 정도로 아주 친한 사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본인은 강하게 부인하지만 김 전 총리 스스로가 박심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3월 16일에는 ‘경선 룰 변경’을 요구하며 끝까지 버텨온 원희룡 전 의원이 제주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이 같은 일련의 진행상황은 ‘경선 흥행’과 ‘친박계 전면 배치’라는 큰 흐름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여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런 분석은 박심이 분명한 실체가 있으며, 그것도 판을 정리할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왼쪽부터 남경필 의원, 원희룡 전 의원
연초 중진차출론이 나올 때부터 이미 박심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다른 새누리당 인사는 “70대의 황우여 대표에게 인천시장 선거 출마를 종용하고, 차기 원내대표 후보로 거론돼 온 이주영 의원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앉히고, 남경필 의원의 경기지사 선거 출마를 이끌어 낸 것 등을 모두 하나로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보기 좋은 지방선거 진용을 갖추기 위해 차기 국회의장, 차기 당대표, 차기 원내대표 경선까지 염두에 둔 ‘큰그림’이 그려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박심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놓고 있는 이런 분석들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큰일 날 소리”라고 일축한다. 주광덕 정무비서관이 지방선거 후보군들을 만나고 다닌 사실이 수차례 노출된 바 있지만 청와대에선 “정무비서관이 여당 의원들을 만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야당 의원들도 많이 만나고 있다”며 ‘물타기’를 하고 있다.
진위야 어떻든 박심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중요한 실재적 변수로 작동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서울시장 경선을 앞두고 김황식 전 총리와 정몽준 의원, 이혜훈 최고위원 간에 벌써부터 험악한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친박계와 비박계 모두 박심을 선거전략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