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천을 약속하며 합당을 성사시킨 안철수 의원(왼쪽)과 김한길 대표가 당내 재검토 요구에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6·4지방선거 기초단위 무공천 번복은 실제 지역에서 뛰는 실무자들에게 생사가 달린 문제다. 새정치연합 창당 작업에 관여하는 한 관계자는 “민주당 대다수가 지금이라도 무공천을 번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새정치연합에서도 이런 흐름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며 “지금 바깥에 나가보면 빨간 바탕에 기호1번이 적힌 대형 현수막만 눈에 띈다. 민주당 현역 구청장들은 무소속 출마가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감조차 못 잡고 있다. 지금 지역 창당대회를 가면 파란색 점퍼(새정치연합 당색)를 입고 김한길-안철수 두 정치인과 사진을 찍으려고 혈안이 돼 있다. 이게 무슨 무공천이고, 새정치냐”고 한탄했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민주당 의원 보좌관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무공천 선언 이후 지역 분위기가 침울하다”고 전하며 “무엇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득표율 15% 달성 여부다. 현행 선거법상 15% 이상 득표해야 선거비를 보전 받을 수 있지 않나. 도전 자체가 쉽지 않아 중도포기자가 속출하고 있다. 당선은 둘째 치고 선거판에서 자칫 막대한 금전적 피해만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로 야권 후보를 상대로 영업을 해온 한 정치홍보업자는 “지난해 말부터 수도권 주요 지역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출마를 준비해온 고객 10여 명을 확보했지만, 지금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황이다”며 “차라리 일찌감치 여야 합의하에 무공천이 현실화됐다면, 오히려 우리가 영업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비후보 등록일을 코앞에 두고 무공천을 선언하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렸다”고 푸념했다.
‘선수’들의 잇단 불만제기에 민주당 안에서도 본격 문제제기에 나섰다. 호남권을 대표하는 박지원 의원은 “새누리당은 공천하고 우리만 폐지하면 후보 난립 등으로 패배하고 당내 조직도 와해된다”며 “선거에서 승리해야 새정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 역시 “무공천 결정으로 서울 현역 구청장 20명이 대부분 낙선하고 그 여파로 서울시장까지 놓치게 되면 안철수 의원 역시 그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새정치연합 합당 과정을 관망하는 친노 인사들까지 이 같은 대열에 동참했다. 지난 18일 새정치연합 내 새정치비전위원회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는 여야 모두가 함께 하자는 약속이지 어느 한 쪽만 무공천하면 불평등한 경쟁이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나온 것이 알려지자, 참여정부 국정홍보처장 출신인 김창호 경기지사 예비후보는 “안철수, 김한길 두 지도자를 믿고 기다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며 경기도지사 후보들에게 기초선거 무공천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는 연석회의를 제안했다.
지난 13일 새정치비전위원회 1차회의에 참석한 안철수 의원과 김한길 대표 등 회의참석자들이 손을 맞잡은 모습. 이종현 기자
정세균계로 분류되는 이원욱 의원은 “당이 내각제를 공약으로 하고 선거를 했는데 헌법 개정을 못해서 대통령제가 계속 유지된다면 대선후보 내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당원들에게 ‘출마하려면 탈당하라’고 하는 것이 새정치냐”며 무공천 재검토를 주장했다.
하지만 기초선거 무공천이 실제로 번복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안철수 의원 의지가 워낙 확고하다. 지난 21일 안 의원은 “(무소속 출마에 따른) 현장에서의 어려움은 잘 알고 있지만 서로 어려움을 나눠서 짊어지고 가기로 약속한 사안”이라며 무공천 번복 불가 방침을 천명했다. 정책네크워크 내일의 한 기획위원은 지난 20일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이제와 무공천 번복이라니, 차라리 합당을 번복하고 헤어지는 게 맞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각에서는 안철수 의원 쪽이 합당 과정에서 최고위원제 폐지와 비례대표 의원의 차기 총선 지역구 공천 배제 등을 들고 나와 논란을 일으키는 것 역시 무공천을 관철하기 위한 협상카드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온다.
친노 성향의 한 비례대표 의원은 익명을 당부하며 “(비례대표 의원 지역구 공천 배제는) 헌법에 명시한 참정권을 제한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안철수 의원이 말하는 새정치는 스탈린의 독재정치냐”며 “나쁜 약속은 빨리 번복하는 게 낫다.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의원도 정당공천제 폐지를 대선공약으로 했던 만큼 안철수 의원만 온전히 책임을 뒤집어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꼴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평론가와 여론조사 전문가들 역시 분석은 엇갈리지만 기초선거 무공천 자체에는 부정적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무공천은 무책임과 같은 말이다”라며 “일부 기초의원·단체장들이 무소속으로 이겨봐야 이후 그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도움을 구할 것인가. 국회의원이나 시장·도지사들이 도움을 요청해 봐야 ‘공천도 안 해줬으면서 이제 와서’라며 뒷짐만 질 게 뻔하다”라고 일갈했다.
친야권 성향의 공희준 정치평론가는 “개인적으로 정당공천 폐지는 반대다. 정당정치를 부정하는 스탠스를 취하면서 국민들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반정치적 정치다. 반정치의 정치는 당장 성과가 좋아도 길게 갈 수 없다”며 “지금 야권에서 지방선거를 하려는 것인지 전당대회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유권자들과의 스킨십은 거부한 채 책상머리에 앉아 전략이나 짜고 있다. 자칭타칭 전략가들이 난무하는 것이 지금 야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꼬집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