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룡은 김정남과 수차례 비밀스레 접촉하며 김정은의 장성택 숙청을 도왔다. 연합뉴스
장성택 처형 직후 지재룡은 응당 제거 영순위로 예상됐던 인물이다. 지재룡은 북한 외교라인의 핵심 인사로 꼽힌다. 주 체코 대사와 유고슬라비아 대사를 거친 그는 지난 1993년 당 국제부 부부장에 올랐으며, 2010년부터 지금까지 북한 외교라인의 최고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주중대사를 역임하고 있다.
장성택과의 인연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장성택 눈에 들어 그의 사람으로 통했다. 북한 내부에선 그를 두고 ‘장성택의 심복’으로 불릴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지재룡은 지난 2004년 장성택이 1차 숙청을 당했을 당시 분파행위자로 지목돼 함께 숙청된 바 있다. 그리고 2006년 장성택이 복귀했을 때, 그도 당 부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만큼 장성택과는 정치적 생사를 함께했던 최측근이었다.
장성택 사후에도 그의 생사는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장성택 사후 전영진 주 쿠바 대사(장성택의 매형), 장용철 주 말레이시아 대사(장성택의 조카), 박관철 주 스웨덴 대사, 홍영 유네스코주재 북한 대표부 부대표 등 그의 외교라인이 숙청됐을 때도 지재룡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아 대북 전문가들은 의문을 자아냈다.
그런데 최근 지재룡의 건재가 속속 확인되면서, 그의 생존 배경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지재룡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중국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는 얘기도 돌았다. 하지만 이는 최근 그가 주중대사로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역시 키워드는 ‘배신’이라는 것이 북한 내부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생존의 배경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큰형인 김정남과의 연루설이다. 이미 김정남이 장성택의 숙청에 협조했다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남이 지난해부터 해외 활동을 합법적으로 보장해주고 북한의 외화벌이 사업 일부를 북한 정권으로부터 위임받는다는 조건으로 그가 지니고 있었던 장성택의 계좌정보와 비밀자료들을 건넸다는 것이 협조설의 요지다.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사형 집행되었다는 YTN 뉴스특보 화면 캡처.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러한 작업에 지재룡이 다리를 놨다는 것이다. NK지식인연대 박건하 사무총장은 “지재룡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김정은 정권에 협력한 덕”이라며 “최근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남과 북한 정권 사이의 협상을 지재룡이 진행했다고 한다. 그가 김정남과 수차례에 걸쳐 비밀스레 접촉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장성택을 배신한 대가”라고 설명했다.
이미 지난해 12월, 민간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은 지재룡의 협조설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방송은 “2013년 10월부터 중국에서 약 1주일간 실시된 당 조직지도부 조사에서 지재룡이 장성택과 관련한 비자금 정보를 털어놨다. 순응의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협조자로 나섰다”며 “이 때문에 북한 내부에선 ‘장성택 심복’으로 불리던 지재룡이 배신자로 불리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알려지고 있는 김정남과의 연루설과도 어느 정도 중첩되는 내용으로 설득력을 높인다.
지재룡이 장성택의 다른 측근과 달리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의 남다른 ‘정치적 촉’과 누구보다 앞선 정보력, 그리고 결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박건하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지재룡이 장성택의 숙청 가능성을 접한 것은 아마도 지난해 6월경일 것이다. 당시 북한 내부에서는 이미 장성택에 대한 내사가 있었다. 2011년에 숙청된 류경 보위부 부부장의 금고에서 발견된 장성택 관련 자료가 내사의 토대였다. 숙청된 류경은 철저한 장성택 사람이었으며 본인이 죽기 전까지 장성택의 정보를 철저히 비밀로 부쳤다. 다른 측근과 달리 지재룡은 이때부터 장성택의 숙청 가능성을 높게 내다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가 중국까지 확대된 것을 보고 심각성을 깨달았다. 노련한 그는 북한 내부의 특수한 권력의 원리를 알고 있었으며, 그 누구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향후 지재룡은 북한의 외교라인 선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한 대북 소식통은 “지재룡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김정은에 협조했다. 김정은으로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된 것”이라며 “주중대사는 중앙 권력과 비교해서는 중요성이 덜하지만, 대외라인에 있어서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자리다. 앞으로 그의 행보도 탄력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예측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