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와 진선미 민주당 의원이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생존자, 실종자·유가족 생활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 한종선 씨(39)는 온 국민이 ‘도가니 사건’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모두에게 잊혔지만 자신을 비롯한 3000여 명을 ‘살아있는 지옥’에 가뒀던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알리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한 씨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2012년 5월부터 시작된 한 씨의 1인 시위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됐으나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옛 일’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우연히 국회 앞을 지나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규찬 교수가 한 씨에 관심을 가지며 “글을 써보라”고 권한 것. 한 씨에겐 형제복지원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으나 전 교수의 도움으로 그해 11월 27일 피해기록을 담은 책 <살아남은 아이>가 세상에 소개됐다.
한 씨는 1984년 9세에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생생한 경험담을 풀어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는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고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이 피해증언을 모으는 원동력이 됐다. 지난해 11월엔 마침내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공식 출범하기도 했다.
대책위가 요구하는 사항은 크게 세 가지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폭행, 치사, 시신 유기, 성폭력과 강제 낙태 등 인권침해 실태를 규명하는 것이다. 또한 피해자들의 강제감금 등에 법적 근거가 있었는지 여부와 부랑인을 끌고 간 이유가 적법한지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형제복지원 내에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의혹은 꼭 풀어야 할 과제로 손꼽힌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12년의 운영기간 동안 현재 확인된 사망자만 551명에 이르는데 문제는 이들 대부분의 마지막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을 대학병원에 임상용으로 300만~500만 원에 팔기도 하고 암매장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책위는 당시 사망 판정을 한 의사와 주검을 태운 화장터 관계자들을 토대로 조사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원안은 형제복지원 운영 당시 박인근 원장.
당시 정부는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깨끗한 거리 조성을 위해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선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 원장은 수용인원에 따라 정부보조금이 나오는 점을 악용해 부랑자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끌어와 강제로 수용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복지원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최대 3146명에 달했으며 이는 전국 최대 규모였다. 1980년대 당시 정부보조금만 연간 20억 원에 달했다. 하지만 지원금 대부분은 박 원장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갔고 수용자들은 감옥보다 더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으며 온갖 인권 유린을 당해야만 했다(71면 박스기사 참조).
‘복지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실체는 1987년 울주 강제노역장에서 수용자 35명이 탈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검찰 수사가 이뤄졌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도 나서 진상조사를 펼쳤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검경은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박 원장의 편에 서서 사건을 은폐·축소하기에 급급했던 것. 전두환 대통령도 박 원장의 구속 소식을 듣고 오히려 “그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박 원장은 7번의 재판을 거친 끝에 업무상 횡령, 초지법 위반, 외환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돼 고작 징역 2년 6월만 선고 받았다. 1심 형량인 징역 10년과 벌금 6억 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대한 문제였던 불법감금죄에 대해서는 ‘순수 부랑인들만 데려다 내무부훈령이 정한 넉넉한 대우를 다 해주었다’는 이유로 적법한 행위라 판결 받았다.
어쨌든 3000여 명의 수용자들은 복지원이 폐쇄되면서 자유를 얻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랑자’라는 따가운 시선과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병을 앓거나 기초수급자로 전락하는 등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다. 하지만 박 원장은 달랐다. 1989년 출소한 박 원장은 다시 재기에 나섰다. ‘재육원’ ‘욥의마을’ ‘형제복지원지원재단’ 등 법인명을 바꿔가며 시설을 운영하는 동시에 스포츠센터, 피부미용, 사우나, 해수온천 등 부대사업을 통해 ‘복지재벌’로 거듭났다.
원생들의 강제 노역을 위해 만든 숙소. 연합뉴스
현재도 박 원장 일가는 장학사업, 무료급식사업, 개척교회 지원 사업, 운전교습소 사업 등을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법인 신양원과 대안학교(신영중·고등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급 아파트, 콘도 및 골프 회원권, 부동산 등 총 1000억 원대의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박 원장과 삼남 박천광 씨(37)는 지난 2012년 8월 형제복지지원재단에 대한 특별지도점검을 통해 불법행위를 적발당해 재판 중이다. 검찰 수사 결과 박 원장 부자는 재단 소유의 대지 매각 대금 12억 6000만 원과 수익사업체인 사상구 해수온천 수익금 5억 8000만 원을 사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횡령과 사기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박 원장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 재판은 전적으로 아들이 책임지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일요신문> 취재결과 형제복지원에 대해 본격적인 논란이 제기되던 지난 1월 27일 박 원장의 큰딸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회복지법인 신양원의 대표이사를 돌연 사임한 사실이 확인됐다. 신양원은 대안학교인 신영중·고등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박 원장이 재단 소유의 대지 매각 대금 및 대출받은 돈 일부가 흘러간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곳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향후 재판 결과에 따라 과징금 등을 통해 재산을 토해내야 할 상황을 대비해 미리 정리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한편 위의 재판과 별개로 늦었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진상 규명도 다시 이뤄질 예정이라 박 원장의 말년은 편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5일 민주당 진선미 의원 등 50명은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 규명 및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특별법)’ 제정안을 발의한 것. 이 법안에는 국무총리 소속 진상규명위원회 설치와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지원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