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신>의 한 장면. 선거철에는 각 지역구 명산에서 당선 기원 굿판이 종종 목격된다.
다음은 야권의 한 중진 의원이 기자와의 사석에서 넌지시 꺼낸 말이다. 당시 일화는 지난 2004년 민주당-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17대 총선을 앞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당은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 이후 총선을 앞두고 대단히 어려운 시점이었다. 그런데 지도부 내부에서 참 이상한 일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중요한 지도부 회의 시간이 갑자기 변경되거나, 선택의 기로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알고 보니 당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지도부 핵심 의원과 친분이 두터운 무속인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을 직접 목격한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거짓말 같은 얘기로 들리겠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10년 전 일이라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는 비화다. 현대 정치는 합리성을 추구한다. 무속이라는 초자연적인 영역과는 쉽사리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속과 관련한 정계의 비화는 적지 않다. 실명을 거론하기 어려울 뿐, 역대 대통령들을 포함해 대부분 유력 정치인들은 이러한 무속인들과의 비화 하나씩은 다 갖고 있다. 이는 독실한 종교인으로 알려진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민심을 먹고 사는 게 정치인들이지만 이를 얻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용하다는 무속인을 찾는 이유”라면서 “물론 선거에 있어서 유권자 중 상당수가 종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대선 때 선거 포스터를 보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 일요신문 DB
서울 강남에서 점집을 운영하는 무속인 A 씨는 정계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인사다. 선거 때마다 수차례에 걸쳐 당선자를 맞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많은 정계 유력 인사들이 그를 찾곤 한다. <일요신문>은 한 정치인의 소개로 A 씨를 만났지만, 정계 고객에 관련한 취재는 한사코 거절했다.
A 씨는 점집을 찾는 정계 인사들에 대해 “외부에 고객 정보는 절대 발설할 수 없다. 이는 우리 업계 내부의 첫 번째 원칙”이라며 “다만 정계 인사를 포함해 VIP급 인사들의 경우 별도의 고객장부를 통해 관리한다. 이들 대부분은 선거를 앞두고 새롭게 나를 찾는 경우보다는 오랜 기간 인연을 맺고 수시로 찾아오는 단골”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만 이러한 정계 인사들 대부분 외부의 눈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점집을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면서 “주변의 보좌진을 보내거나 부인이 남편의 사주를 들고 온다. 때때로 전화 상담을 진행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단순한 점괘를 넘어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굿을 요청하는 후보자들도 적지 않다. 선거철을 대목이라 부르는 이유다. 무엇보다 각 지역구 명산에서는 당선을 기원하는 굿판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수도권의 북한산, 남한산성, 대구의 팔공산, 강원도의 태백산 등이 주요 거점지역이다.
때가 때인 만큼 ‘당선 부적’도 등장했다. 역술인 B 씨는 ‘부적도사’로 불릴 만큼 용한 부적을 잘 쓴다고 하다. 그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특별히 정치인들을 위한 ‘당선 부적’이라는 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원래 중요한 시험이나 승진을 앞둔 사람들에게 관운을 풀리게 하려는 목적으로 부적을 쓰곤 한다. 최근엔 지방선거 출마를 목전에 둔 많은 후보자들이 이러한 부적을 찾더라. 이들에게 부적을 몸에 지닐 것을 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엔 이러한 풍토를 반영하듯, 선거철 후보자들을 고객으로 하는 정치컨설팅 업체 중에서 후보자들의 사주풀이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많은 컨설턴트들이 정치대학원이나 아카데미를 수료하는데 최근엔 그 과정 중에서 유명 역술인을 강사로 모시는 경우도 있더라. 나 같은 경우,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사주를 공부했다. 후보들의 만족도도 높다”고 설명했다.
물론 지나친 맹신으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찮다. 지난 대선 때 한 유력 정치인은 현직을 내던지며 당내 경선에 나선 바 있다. 당시 정계 내부에서는 그의 출마를 두고 ‘무리한 선택’이라고 입을 모으곤 했다. 무엇보다 ‘현직’이라는 점, 그리고 후일을 노린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사전 예비조사에서도 1위 후보와 지지율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 때문에 주변의 만류도 심했다는 것. 결과는 역시나 참패였다.
후일에서야 알려진 얘기지만, 그의 뒤에는 그의 출마를 부추긴 무속인이 있었다고 한다. 해당 무속인이 당시 후보자의 출마 이유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다. 해당 무속인은 ‘올해 당신의 운이 분명이 왔으니, 현직을 내던져도 해 볼만하다’고 전달했고, 그의 보좌진까지 이 말에 취해 선거를 치렀다는 것이다.
유명 역술인인 조규문 경기대 문화예술대학원 대우교수는 “정치인들이 대소사를 앞두고 무속에 빠지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다”라면서 “지도자는 천명을 받아야 한다. 그 천명은 민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속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그 시간에 시민들 속에서 단 1분이라도 더 함께하는 것이 당선의 지름길”이라고 조언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