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가 ‘무공천 방침 철회’ 공동기자회견을 위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실에 들어서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4월 10일 오전 8시 30분 새정치민주연합 당사. 이석현 당원투표 및 국민여론조사 관리위원회 위원장이 기초선거 무공천 여부 결과가 담긴 봉투를 들고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석상에 나타나기 전까지 안철수 대표의 표정은 밝았다. 안 대표는 옆 자리에 앉은 김한길 대표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종일관 환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최고위원은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안 대표는 무공천이 엎어질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난 후 기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를 메모하는 것도 봤다. 결과를 어느 정도 자신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안 대표는 당 안팎에서 여론조사 주장이 확산되자 자체적인 시뮬레이션을 통해 무공천 유지를 확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새정치연합 전략파트에서도 무공천 여론이 높다는 보고를 안 대표에게 했다고 한다. 안 대표가 여론조사 발표 전날 “당원 생각과 제 생각, 국민 생각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 바탕으로 한다. 안 대표는 10일 최고위원 회의에서도 “어제 잘 잤느냐”는 질문에 “잘못될 일이 있겠느냐”고 말했을 만큼 그 결과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석현 위원장이 손에 들고 있던 봉투의 내용은 안 의원 기대를 일거에 무너트렸다. 새정치연합이 35만여 권리당원과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천 53.44%, 무공천 46.56%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는 당원투표에선 공천(57.14%)이 무공천(42.86%)보다 높게 나왔고, 국민 여론조사에선 공천(49.75%)과 무공천(50.25%)이 팽팽했다. 민심보다는 ‘당심’이 결과를 좌우한 셈이다. 안 대표는 믿었던 국민 여론조사에서 공천 지지가 의외로 높게 나온 부분을 아쉬워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위원장 발표 직후 안 대표 얼굴은 일그러졌다. 굳은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서던 안 대표는 “이것이 국민과 당원의 뜻이라면 따르겠다. 대표는 위임된 권한에 불과하다”는 말만을 남기고는 대표실로 향했다. 안 대표는 예정됐던 기자회견을 뒤로 미루고 6시간 넘게 두문불출했다. 점심 땐 도시락을 시켜 혼자 식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 대표의 한 측근은 <일요신문>에 이렇게 귀띔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별다른 말이 없었다. 도시락도 남겼다. 주변에서 여론조사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만류했을 때도 결과를 확신했던 안 대표였기에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안 대표는 그동안 “약속을 지키는 게 새 정치의 요체”라며 기초선거 무공천 여론을 이끌어왔다. ‘정치쇼’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청와대를 직접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 면담 신청서를 작성한 것도 지방선거를 앞두고 ‘약속 프레임’을 선점하기 위한 노림수로 받아들여졌다. 더군다나 그는 측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의 통합을 밀어붙일 때 무공천을 명분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공천을 뒤집는다는 것은 안 대표 입장에선 정치적 치명상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정치권 일각에선 긍정적인 반응도 나오고 있긴 하다. 안 대표가 향후 당을 장악할 수 있는 자양분을 마련했다는 관측이 대표적이다. 이는 안 대표가 당을 위해 정치적 신념을 버리면서까지 희생했다는 동정론과 맞닿아 있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안 대표 결단이 재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또 안 대표가 여론조사와 당원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자신의 입장을 접었다는 점을 거론하며 그동안 지적받았던 ‘불통’ 이미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안 대표 최측근들은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몇몇 참모들은 이미 안 대표와의 ‘결별’까지 결심한 상태다. 지난 2012년부터 안 대표를 도왔던 한 관계자는 “민주당과의 통합 때 떠나려 했지만 안 대표 요청으로 (새정치연합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번엔 미련 없다.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다. 아마 이탈 규모가 더욱 클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민주당과의 통합 발표 후 윤여준 전 새정치추진위원회 의장과 김성식 전 의원 등 핵심 측근들이 안 대표를 떠난 바 있다.
정치권에선 무공천 여론조사를 계기로 안 대표를 향한 구주류 친노 세력의 반격이 거세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동안 무공천 파기 카드로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가 이끄는 신주류 흔들기에 나섰던 친노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자평을 하고 있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친노는 통합 과정에선 소외됐지만 신주류의 명분이었던 무공천을 철회시키면서 힘의 균형추가 비슷해졌다”고 관측했다. 문재인 의원을 구심점으로 하는 친노는 일단 지방선거 전까진 김한길·안철수 체제를 지원사격할 계획이지만 그 이후 본격적인 주도권 탈환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안 대표 측은 ‘내부의 적’을 더 걱정하는 모습이다. 우군이라고 생각했던 김한길 대표 측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두고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안 대표가 지지층 이탈, 친노의 반격, 김 대표와의 균열이라는 3중고를 겪게 될 것”이라고 점치기도 했다. 안 대표 측의 몇몇 참모들은 민주당과의 통합 당시에도 김 대표의 ‘역공작’을 우려하며 반대 의사를 나타냈었다. 김 대표가 지방선거를 위해 안 대표를 끌어들이려 사전에 치밀한 전략을 세웠고, 무공천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미끼’라는 게 골자였다.
무공천 여론조사 결과 발표 후 정치권 주변에선 “안 대표가 여론조사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김 대표 쪽에서 여론조사를 왜곡해 작성한 자료들을 믿었기 때문이었다”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나돌았다. <일요신문>이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복수의 안 대표 측 인사들 역시 이러한 소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안 대표의 또 다른 측근은 “김 대표는 대통령을 두 번이나 만들었던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다. 안 대표가 현실 정치 감각이 떨어진다고 하기엔 김 대표의 지략이 너무 뛰어나다. 안 대표가 참모들 말이라도 잘 들었으면 이런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안타까워했다.
이어 그는 “여론조사에서 당원 투표율이 25%였다. 네 명 중 한 명만 투표한 것이다. 당의 진로를 정하는 중요한 투표인데 말이 되느냐. 김 대표가 조금만 조직을 가동했더라면 투표율은 올라갔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반면 친노는 조직적으로 투표 독려가 있었다고 한다. 당원 투표에서 친노가 원하는 무공천 파기가 높게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안 대표 진영에선 무공천을 파기한 이상 새정치연합 탈당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안 대표로선 쉽지 않은 결정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강경론자들은 통합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상황에서 이대로 가다간 안 대표가 ‘팽’당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안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여의도에 회자되고 있는 ‘김한길 대망론’이 관심을 끈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안 대표를 끌어들여 친노 힘을 빼놓더니 이번엔 무공천 여론조사로 안 대표 입지를 좁혀 놨다.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김 대표가 어느 순간 이슈 중심에 섰다”며 “지방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내면 그동안 전혀 대권주자로 거론되지 않던 김 대표가 잠룡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란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선 안 대표 거취가 6·4 지방선거 결과와 연계될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 이에 대해 안 대표 측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안철수 마케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새정치연합 내에서 기반을 다지기가 힘든 까닭에서다. 또 무공천 말 바꾸기에 대한 공세가 안 대표에게로 집중될 것을 우려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권대우 정치컨설턴트는 이렇게 조언했다.
“안 대표 최대 무기는 지지율이다. 그런데 이번 무공천 여론조사에서 안 대표 뜻이 좌절됐다. 더 이상 안철수라는 이름은 ‘신상(신상품)’이 아니다. 식상하기까지 하다. 삼고초려하며 안 대표를 모셔왔던 김 대표 쪽에서 안 대표가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면 지금처럼 같이 가겠느냐. 안 대표로선 잘하면 새정치연합 소수 계파 수장은 될 수 있겠지만 좀 더 큰 꿈을 꾼다면 진지하게 향후 행보를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