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들의 출판기념회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연말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복도 게시판에 출판기념회 안내 포스터가 빼곡히 걸려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연말, 오는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후보로 나서는 여권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정치인은 오랜 기간 공백기를 가진 터라 대중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대형 호텔 컨벤션홀에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중앙 및 지역 언론사들은 물론 여권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하며 성황을 이뤘다.
하지만 정작 출판기념회에서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책에 대한 소개와 내용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한 정치권 관계자는 “말이 책이지, 상대 유력 후보에 대한 비방이 전부였다”며 “그 책은 한마디로 오로지 출판기념회를 치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문제는 해당 후보뿐 아니라 상당수 정치인들이 다 마찬가지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해당 도서의 제목과 구성은 정책집이었지만, 실제는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이 절반 이상이었다. 건전한 비판을 넘어 제대로 된 근거와 통계 및 정책 자료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무엇보다 책 구성의 상당수가 사진이라는 점에서 편집 역시 조악했다. 당시 참석자에 따르면 한마디로 ‘급조된 종이뭉치’에 불과했다.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책을 내는 일은 이제 트렌드가 됐다.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지난 2월까지 전국에선 광역후보부터 기초후보까지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진행했다. 여야 지도부 일정의 상당수가 각 후보자들의 출판기념회로 빼곡하게 채워질 정도였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책을 내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이다. 실제 책보단 출판기념회 자체가 더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 한 출판기획자는 “정치자금 제한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현재로선 후보자들이 돈을 만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라며 “특히 자금의 여유가 없는 기초후보들의 경우 없는 돈을 내서라도 책을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는 선거 90일 전까지 선거관리위원회의 제지 없이 누구든 열 수 있다. 책 구입을 통해 낼 수 있는 후원금은 사실상 책 단가와 무관하다. 소위 ‘A급’으로 통하는 거물급 인사들의 경우 출판기념회로 벌어들이는 후원금이 5억 원을 넘는다고 한다. 3선 이상의 중진급 인사들은 ‘B급’으로 분류돼 평균 2억~3억 원을 모금하는 것으로 전해지며 ‘C급’으로 통하는 초·재선 인사들은 최소 1억 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다는 후문이다.
책 출간을 통한 정치인들의 자기홍보는 덤이다. 한 정치홍보업자는 “책 출간을 통한 후보자 홍보는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보단 지역에서 더 활발하다”며 “문화적 혜택이 빈약한 지역의 경우, 정치인들의 서적이 유권자에게 뿌려지면 효과가 금세 나타난다. 오히려 100원짜리 정책 홍보 전단지 1만 장보다 돈을 더 들여서라도 책 1권을 뿌리는 게 낫다. 여기에는 언론사들의 리뷰 기사도 한몫한다. 지역에서 책을 내고 사전 기사가 동반된다면 그 후보는 한 발 앞서나가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책의 내용보단 그에 따른 부수 효과에 관심이 많은,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국내 정치 출판업계의 기형적인 문화와 구조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출판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출판오염’ 현상으로 치부한다. 투표를 앞둔 유권자에게 오랜 기간 고뇌하고 숙고를 거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정제된 정책 비전을 책에 담아내 전달한다면야 문제가 없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후보자들의 책들 상당수는 날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서의 정치홍보업자는 “지역의 경우, 출판 인쇄물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ISBN(표준도서번호) 신고도 안하는 경우가 꽤 있다. ISBN 신고를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책 유통은 불가능하다”며 “이는 결국 명목상 책을 발간할 뿐, 사실상 선거를 앞두고 기념회를 통해 지역에 책을 살포하기 위함이다. 이런 책들은 시중 서점은 물론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서울의 한 대형서점 정치분야 부스. 정치인들 자서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일부 출판업자들의 상혼도 이러한 현상을 부추긴다. 앞서의 출판기획자는 “저가 날림 책을 출간하는 업체들 대부분은 인쇄소급의 소규모업체에서 출판신고를 내고 한철 장사를 하는 경우”라며 “이들 업체 대부분 출판 기획 등 정상적인 과정을 생략한 채 정해진 포맷과 편집을 토대로 페이지 수 채우기에 급급하다. 이들 손에 맡겨진다면 한 달 안에도 책 출간이 가능하다. 책 찍어내는 기계와 같다”고 전했다.
이는 사실이었다. <일요신문>은 서울과 경기도 후보자들을 상대로 영업을 진행했다는 한 업체에 문의해봤다. 기자는 7월 30일 재·보궐 선거를 염두에 둔 가상의 후보자 측 인사로 가장해 한 달 안에 책 출간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자서전 형식으로 갈 것이라면 우리에게 이미 기본적 포맷이 있다. 2번 정도 대필자와의 인터뷰가 가능하다면, 초고는 2주 안에 완성할 수 있다. ISBN 등록까지 한 달 안에 가능하다. 다만 그간 사진만 충분히 준비해 달라”면서 “필요하다면 출판기념회 기획까지 진행할 수 있다”며 거래를 제안했다. 이러한 업체들 상당수는 책 출간부터 출판기념회 기획까지 일명 ‘통영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가격은 옵션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기본 1000권을 출간할 경우, 출판기념회까지 2000만~3000만 원의 시장 가격대가 형성돼 있었다. 다만 대필자로 등단 문인이 나설 경우, 옵션가가 추가된다.
정치컨설턴트 이재관 마레컴 대표는 “제대로 된 정치인의 출간물이 나오려면 1년이 소요된다. 보좌진의 자료수집부터 출판사의 기획회의, 대필자와의 미팅은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여기에 정책 자료집을 만든다면 전문가들의 감수도 필요하다”면서 “몇몇 중진을 제외하고 이러한 숙련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이 국내 정치 출판업계의 현실이며 이러한 책들은 당연히 질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한국에는 빌 클린턴의 <마이 라이프>, 넬슨 만델라의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과 같은 명저가 없다. 왜 그렇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퀄리티(질)에 관심이 있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자서전을 갖고 선거를 치르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정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자서전들만 수두룩하다. 이들은 나무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 불과하다”며 “선관위는 선거를 앞두고 이러한 정치인들의 책 출간은 제재하지 않고, 정작 필요한 공약집은 불법으로 치부하고 있다”고 현재 선거법의 맹점을 꼬집기도 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