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작은 사진 왼쪽)의 두 번째 아내인 헤더 밀스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거짓말로 주변과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폴매카트니와 헤더 밀스는 1999년 4월에 처음 만났다. 1980년대의 유명 모델이었던 밀스는 1993년 불의의 사고를 겪었다. 당시 남편인 알피 카말과 함께 런던 켄싱턴 로드에서 길을 건너다 경찰 오토바이와 충돌한 것이다. 그녀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폐에 손상을 입었다. 골반에도 철심을 박아야 했다. 더욱 심각한 건 다리였다. 결국 그녀는 왼쪽 무릎 아래 부분을 절단했고, 의족에 의존해 걸어야 했다. 보상금을 받긴 했지만, 그녀의 모델 경력은 20대 중반에 끝나 버렸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자선 단체를 설립해, 전쟁 지역에서 불구가 된 사람들에게 무료로 의족을 나눠 주기 시작했고, 지뢰 반대 운동의 선두에 섰다. 그녀는 활동 범위를 점점 넓혔고, 동물 보호 운동의 대표적 셀러브리티 중 하나가 되었으며 채식주의의 옹호자로도 이름을 높였다.
폴 매카트니와의 만남도 이러한 사회 활동의 결과였다. 사회 각계에서 공익적인 일을 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프라이드 오브 브리튼’ 시상식에 매카트니는 세상을 떠난 아내 린다 이스트먼을 대신해 참석했던 것. 린다는 동물 보호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고, 사후지만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때 매카트니는 헤더 밀스를 만나, 그녀의 재단에 15만 파운드(약 2억 6000만 원)를 기부한다.
이후 밀스는 자선 활동 기금 마련을 위한 노래를 만들며 매카트니의 도움을 받았고, 급기야 2001년 7월에 매카트니는 26세 연하의 여성에게 프러포즈를 했으며, 2002년 6월 11일에 결혼했다. 식장에선 매카트니가 신부를 위해 만든 ‘헤더’라는 노래가 흘렀다. 그리고 2003년 10월 28일에, 헤더 밀스는 딸 베아트리체를 낳았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2006년 5월, 그들은 별거에 들어갔고 다음 해부터 밀스는 수많은 인터뷰를 자청하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매카트니와 전처인 린다 사이에서 낳은 첫딸 스텔라(1971년생)는 계모인 헤더 밀스(1968년생)와 불과 세 살 차이였는데, 밀스는 스텔라의 질투와 사악함 때문에 더 이상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법정 진술에선 발언 강도가 더욱 세졌다. 그녀는 매카트니가 알코올 중독자이고 수시로 마리화나를 피우며, 깨진 와인잔으로 자신을 위협했고, 술에 취해 임신 중인 자신을 욕조로 밀어넣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내, 엄마, 연인, 친구, 비즈니스 파트너 그리고 상담사로서 충실했다며 1억 2500만 파운드(2181억 원)의 위자료를 요구했다.
하지만 판사인 휴 베넷은 “헤더 밀스는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법정에선 모순되고 부정확했으며 솔직하지 못했다”며 “그녀는 사건의 당사자라기보다는 목격자 수준”이었다고 냉담하게 이야기하며 매카트니에 대해선 “정직했다”고 평했다. 최종 판결은 2430만 파운드의 위자료와 17세까지 딸의 양육비를 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판사는 어느 부분에서 밀스가 거짓말쟁이라고 느꼈던 걸까? 사실 이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2002년에 첫 자서전을 내는데(이 책은 한국에도 <내 운명의 창고에 들어 있는 특별한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수많은 반론이 이어졌다.
밀스는 자신이 8세 때 수영장 강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밀스의 이웃에 살던 마거릿 앰블러라는 사람이 피해자였다. 앰블러는 “밀스는 내 이야기를 자신의 것인 양 지어내고 있다”며, 정신적 고통 등에 대해 밀스를 고소했다. 15세 때 워털루 역 근처에서 4개월 동안 홈리스 생활을 했다는 것도, 계부인 찰리 스태플턴에 의해 거짓이라는 게 밝혀졌다. 런던 교외의 쥬얼리숍에서 일했다고 했는데, 그 가게 주인은 그녀를 고용한 사실이 없다며, 괜히 가게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그녀가 금목걸이를 훔쳐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알피 카말은 그녀가 모델계에 진출할 때의 스폰서 같은 존재였는데, 밀스는 모델 계약을 했다는 거짓말로 그를 속이고 파리로 떠나 레바논 출신의 갑부 조지 카잔과 2년 동안 동거했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온 밀스와 카말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조건은 정신 치료를 통해 거짓말하는 습관을 고치는 것이었다. 물론 고치지 못했다. 발칸 반도 전쟁 때 런던에서 스무 명 정도의 난민을 도운 것을, 유고슬라비아 전쟁 지역에 2년 동안 있었다고 부풀렸다.
카말과 이혼 후 1999년 다큐멘터리 감독 크리스 테릴과 재혼하려 했지만, 결혼 5일 전에 그들은 남남이 되었고, 밀스는 언론에 테릴이 게이이며 MI6 요원이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사실무근이었다. 그녀는 매카트니를 만나기 전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 사실을 속였다. 자신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다고도 했고, 어머니가 자동차 사고로 다리 절단 직전까지 갔다고 말했으며, 영국의 3대 정당이 모두 자신을 영입하려 했고, 영국 왕실이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며, 클린턴이 자신을 만나려 했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물론 모두 거짓이거나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경찰도 나섰다. 그녀는 툭하면 생명이 위험하다며 구급 전화를 걸지만, 막상 가보면 아무 상황도 아니라는 것. 그녀가 사는 지역의 경찰서장은 “밀스는 마치 양치기 소년과 같다”고 말했고, 급기야 밀스의 아버지는 “밀스는 매우 혼란스러운 인간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폴 매카트니도 그녀의 부정직함에 결국 이혼을 결심한 걸까? 그는 별거 기간 중에 만난 뉴욕 교통국(MTA) 경영진인 낸시 쉬벨과 2011년 10월에 결혼했다. 다음 주엔 매카트니와 함께 비틀스를 이끌었던 존 레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