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고위 공직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이른바 ‘국가 개조 구상’의 진척 상황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적폐(積弊·오랫동안 쌓여온 폐단)들을 일소하겠다면서 근본적인 개혁을 공언한 상황이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만들어내야 할 정부 차원에서는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공직자는 “어찌 보면 국가 개조라는 말은 내각 총사퇴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이라며 “VIP(대통령)가 어마어마한 수준의 예고방송을 해 놓은 셈인데 실망스러운 본방송을 내보내게 될까봐 잠이 안 올 정도”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월 29일 국무회의에 앞서 묵념하는 모습. 박 대통령을 이날 참사 발생 후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사진제공=청와대
“당에서 내각 총사퇴 필요성을 주장했을 때에도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청와대가 갑자기 국가 개조를 하겠다고 들고 나오니 의아했다.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나보다 하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해지고 있다. 어떻게 개조해야 할지에 대해 당에서는 계속 의견을 전달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전달이 안 되고 있다. 국가 개조라는 말에 부합하는 뭔가를 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들의 얘기는 정부·여당에서도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무슨 해답을 내놓을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기저에는 ‘과연 내놓을 게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깔려 있다. 이는 동시에 박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보조를 맞추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 혼자 치고 나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소위 박 대통령의 국가 개조 구상이 외부로 전해진 과정, 이후 진행되는 상황 등을 보면 이런 추론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이 ‘국가 개조’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지난 4월 29일 국무회의 석상에서가 처음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참사 발생 후 처음으로 희생자와 가족, 국민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과거로부터 겹겹이 쌓여 온 잘못된 적폐들을 바로잡지 못하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너무도 한스럽다. 집권 초에 이런 악습과 잘못된 관행들,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상화하는 노력을 더 강화했어야 했는데 안타깝다”며 “이번에는 반드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잘못된 문제들을 바로잡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틀을 다시 잡아서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고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길에 나설 것이다. 내각 전체가 모든 것을 원점에서 국가 개조를 한다는 자세로 근본적이고 철저한 국민안전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박 대통령이 이날 국무위원과 청와대 참모들에게 큰 틀의 과제만 던져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이전의 ‘깨알지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 고질적으로 뿌리 내려 고착화된 비정상적인 관행과 봐주기식 행정문화를 지적했는가 하면 퇴직 공직자들에 의해 장악된 협회와 민간 기업, 정부로 이어지는 비리 사슬 구조의 심각성도 꼬집었다. 가칭 국가안전처를 신설해 재난안전 컨트롤타워를 일원화하겠다는 방침도 직접 밝혔다. 심지어 세월호가 증축 등 구조 변경으로 인해 안전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여객선에 대한 안전 점검과 운항관리 규정을 개정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장관들에게 과제를 낸 게 아니라 답을 불러줬다는 해석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날 국무회의가 끝나자마자 청와대에서는 김기춘 비서실장 주재로 긴급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렸다. 박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신속하게 이행하기 위한 후속 회의 성격이었다. 이 자리에서 청와대는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18개 항목으로 세분, 수석실별로 배분했다. 수석실별로 각 부처를 독려하고 이행 상황을 점검하기로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안산합동분향소 조문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18개 항목에는 △희생자 실종자 가족 편의제공 및 의료상담 지원 강화 △자리 보전을 위해 눈치보는 공무원 퇴출 조치 △검·경 합동수사본부의 엄정하고 신속한 수사 진행 및 사고원별 규명 후 강력한 책임 조치 △안전정책 안전점검 위기대응능력 등의 총체적 점검 및 근본적 대안 마련 △대형사고시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와 통계 발표 등이 망라됐다. 이후 청와대와 정부의 후속 조치도 18개 항목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칫 박 대통령의 국가 개조 구상이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전혀 새로울 것도, 혁신적일 것도 없는 ‘속빈 강정’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청와대와 여당에서조차 국가 개조론의 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 대통령의 국가 개조 구상 발표가 악화된 민심을 진정시키고 대대적인 개혁으로 가는 계기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흔들리는 정부의 신뢰를 더욱 떨어뜨리게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당장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는 새누리당의 초조감은 더하다. 새누리당의 한 고참 당직자는 “최근 역대 정부들이 처했던 위기상황과 당시 어떤 식으로 위기를 돌파했는지 등을 검토해 봤는데, 현재 박근혜 정부의 위기는 역대 어느 정부도 겪지 못했던 수준이라고 해도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닌 것 같다”고 토로하면서 위기감을 이렇게 전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집권 1년도 안 돼 최악의 위기에 처했지만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를 통해 단번에 위기를 넘어섰다. 이명박 정부도 집권하자마자 촛불 사태를 맞았지만 극복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국민들이 정부 당국의 발표보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떠다니는 근거 없는 주장들에 더 귀를 기울이는 상황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도 “한 대학교수로부터 ‘이번 참사는 김영삼 정부 말기의 IMF 사태에 비견될 만하다’는 의견을 들었다”면서 “IMF 사태가 한국 경제 시스템의 민낯을 드러내 보여줬던 것처럼 이번 세월호 참사가 공직사회, 안전 시스템의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얘기였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위기 돌파 시도가 국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