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대통령측근비리청문회에 출석한 송광수 검찰총장과 김종빈 대검차장. | ||
이미 불법 자금 수수에 연루된 9명의 현직 의원을 ‘제물’로 삼아 구속시킨 대검 중수부는 3월 초순까지 정치인 10여 명을 추가로 소환 조사한 뒤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당장 한나라당으로부터 불법 자금을 받은 단서가 드러난 이인제 자민련 총재 대행과 불법 대부업체 ‘굿머니’ 자금을 수수한 신계륜 열린우리당 의원을 시작으로 정치인 소환조사가 봇물을 이룰 전망이다.
안대희 중수부장은 지난 주말 “정치인 수사는 3월 6일까지 끝내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수사하고 있다”며 “한나라당은 용처, 민주당은 규모를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이 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로드맵’을 구체적인 날짜까지 박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는 검찰 수사가 매듭 단계에 진입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안 중수부장이 밝힌대로 검찰은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불법 모금액을 대부분 밝혀낸 상태에서 사용처가 규명되지 않은 돈의 행방을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지금까지 검찰이 확인해준 금액은 8백20억원 정도인데, 최종 집계치는 아직 베일이 벗겨지지 않은 롯데그룹 비자금 등을 감안할 때 이보다 더 많은 9백억원대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한 검찰은 노무현 후보 캠프측에 대해서는 기존에 드러난 95억원 이외의 불법 자금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검찰은 노 후보측이 5대 그룹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한품도 밝혀내지 못해 한나라당과의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는 점을 감안해, 이들 재벌기업에 ‘무기한 수사’를 예고하는 등 고강도 압박작전을 구사하고 있다.
가장 폭발력이 큰 사안은 아무래도 한나라당이 모금한 자금의 사용처에 대한 수사다.
지금까지 검찰 수사로 드러난 것만을 따졌을 때, 한나라당측이 노 후보 캠프측에 비해 모금한 돈이 월등히 많은 데다 아직 용처가 가려지지 않은 액수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검찰은 일단 한나라당이 모은 8백 20억원 가운데 2백40억 ~ 2백50억원 가량이 당 공식계좌에 임금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돈의 대부분은 현금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디론가 증발한 1백50억 ~ 1백70억원대의 삼성그룹 채권이 차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해 안 중수부장은 최근 “조만간 정치인 5~6명의 소환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이들 정치인은 바로 삼성그룹 채권을 제외하고 행방이 묘연한 나머지 돈의 용처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처음으로 이름이 공개된 이인제 자민련 총재 대행은 지난 2002년 12월 대선 직전 한나라당으로부터 ‘이회창 후보를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2억5천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수사결과 당시 이회창 후보의 정무특보였던 이병기씨는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의 공보특보를 맡았던 김윤수씨에게 “이인제 의원이 이회창 후보를 지원유세하는 등 이 후보에게 유리한 활동을 해달라”며 현금 2억5천만원이 든 사과상자 2개를 전달했다. 김씨는 이 중 2억5천만원을 중간에서 가로채 개인 채무 변제 등에 쓰고, 나머지 2억5천만원은 이대행의 부인에게 직접 전달했다고 한다.
이 대행이 돈을 받은 시점은 민주당을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한 직후인 1월3일쯤이며, 그는 그로부터 10일 정도 지난 12월15일 충북 청주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 대행은 당시 회견에서 “내가 민주당을 탈당한 것 자체가 노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오는 19일 이회창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대행 수사와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끄는 대목은 검찰이 “김영일 한나라당 의원으로부터 관련 진술을 받았다”고 밝힌 부분이다. 대선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으로서 불법 모금액의 사용처를 꿰뚫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 의원이 ‘입’을 열기 시작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 지난해 11월 대검 기자실서 회견중인 김영일 의원. | ||
이에 앞서 검찰이 대선 직전 한나라당에 입당한 의원 11명이 당으로부터 각각 2억 ~ 2억5천만원 정도의 현금을 받은 단서를 포착한 것도 ‘사용처 수사’를 통해 거둔 성과로 전해졌다.
해당 의원 11명은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옮긴 전용학 원유철 이근진 강성구 박상규 김원길 의원과 김윤식 전 의원, 자민련에서 한나라당으로 이적한 이완구 이양희 이재선 의원, 그리고 무소속에서 한나라당에 입당한 한승수 의원이다.
문효남 수사기획관은 “한나라당 사무처 관계자로부터 ‘이 돈은 당시 현금으로 재정국에 보관돼 있던 불법 대선자금이며, 당시 김영일 사무총장이나 서청원 선대본부장이 이들 의원을 직접 불러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이들 의원이 현금으로 돈을 주고 받은 것은 불법자금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라며 “이들 의원을 차례로 소환조사한 뒤 돈세탁방지법 또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이 불법 대선자금 20여억원을 ‘입당파’의원 11명에게 ‘이적료’로 제공한 사실 역시 검찰이 김영일 의원의 수사 협조를 얻어 확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검찰 주변에서는 “머지 않아 검찰이 이인제 의원에 버금가는 거물급 정치인 한 명의 불법 자금 관련 혐의를 공개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안 중수부장은 지난 20일 ‘이인제 의원과 같은 사례가 또 있느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허허’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 부장은 또 한나라당 자금의 용처 수사와 관련해 “말할 게 더 있는데, 나중에 민주당, 한나라당 한꺼번에 말하겠다”며 ‘2탄’이 준비돼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또 다른 거물급 정치인’이 거액의 대선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가 있는 한나라당 중진급의원 중 한명이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그 주인공은 안 중수부장이 지난 연말 지나가는 말로 “선거자금으로 빌딩을 산 정치인이 있다”고 언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검찰이 ‘입당파’ 11명 이외에 곧 소환 조사하겠다고 밝힌 의원 5 ~ 6명 중에는 노 후보 캠프측 인사들도 들어 있으며, 그 중에 ‘거물급’이 포함돼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나라당측 ‘사용처 수사’의 최종 하이라이트는 ‘삼성 채권’ 문제가 장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검찰이 파악한 ‘삼성 채권’ 규모는 3백30억원대로 알려졌는데 이 중 1백50억 ~ 1백70억원을 추가로 찾아냈다고 밝히자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1백70억원어치의 채권은 삼성측에 돌려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한나라당의 ‘채권 반환’ 주장을 사실상 일축한 상태다. 대신 검찰은 서정우 변호사와 김영일 의원 등을 상대로 채권의 ‘진짜 행방’을 캐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검찰은 사라진 ‘삼성 채권’이 아직까지 현금화되지 않은 채 누군가의 손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회창 전 총재 측근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자금의 행방에 대한 열쇠는 이 회창 전 총재측이 쥐고 있다”는 민감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치권의 한 소식통은 “이 전 총재측 핵심 인사들이 ‘대선 잔여금’ 상당액을 향후 정치적 영향력 유지를 위한 ‘실탄’으로 비축해 놨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며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최근 다소 무리해 보일 정도로 ‘이회창 책임론’을 들고나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검찰도 ‘삼성 채권’ 수사에 상당한 진척을 거뒀으나, 결정적으로 미국에 체류중인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이 사안의 심각성 때문에 귀국을 미루는 바람에 막판 규명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업체 ‘굿머니’ 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도 어디까지 불똥이 튈지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검찰은 일단 지난 20일 검거한 굿머니 전 대표 김영훈씨로부터 “2002년 12월 신계륜 의원에게 정치자금 명목으로 현금 3억원을 전달했다”는 진술을 확보해 수사중이다. 검찰은 “신 의원이 굿머니 돈 이외에 다른 기업체들로부터 조금씩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신 의원을 사법 처리한 뒤 굿머니측이 대선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측에 각각 수십억원대의 불법자금을 건넸다는 의혹의 진상을 파헤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신 의원 이외에 다른 정치인 몇 명이 ‘유탄’을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지레 겁먹은 정치권이 임시국회를 3월까지 연장할 경우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지만, 지난 1월에 이어 현역위원들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되는 사태가 재현될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