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 전 공천에서 허주(맨 왼쪽)를 잘라냈던 하순봉 의원(가운데)이 이번에는 김문수 의원(오른쪽)에게 같은 일을 당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남의 눈에 눈물 내면 내 눈에 피눈물 난다”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치권은 공천 작업과정에서 배신과 분노, 원망과 절망의 외침소리로 뒤덮히고 있다. 단연 압권은 한나라당 하순봉 의원의 공천배제를 둘러싼 기구한 운명이다.
하 의원은 지난 2000년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2·18 피의 대학살’을 주도했다. 김윤환 조순 이기택씨 등 쟁쟁한 야당 중진들을 한꺼번에 잘라냈다. 한나라당의 ‘저승사자’는 하 의원이었고, 모든 권력과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고 있었다.
그로부터 4년 뒤 하 의원은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으로부터 ‘구시대 인물’이란 이유로 공천에서 배제됐다. 4년 전 자신이 휘두른 칼과 똑같은 칼로 이번엔 자신이 베인 것이다. 하 의원은 김문수 위원장에게 인간적 배신감과 모욕감 등을 강하게 토로했다. 이는 공교롭게도 4년 전 하 의원에게 공천배제를 당한 뒤 김윤환 전 의원이 뱉었던 ‘배신감 독백’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다. 하 의원이 공천심사위원장으로 권세를 누릴 당시만 해도 4년 뒤 자신이 잘려나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 의원이 5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뱉은 말들은 죽고 죽이는 정치권의 비정한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음은 당시 하 의원의 공천과 관련된 주요 발언이다.
“이번 공천과정은 인륜을 어겼다. 나와 최병렬과의 개인적 관계는 말하지 않겠다. 16대 총선에서 나는 사무총장을 하면서 공천심사를 했다. 그 노른자위, 황금지역인 서초·강남 공천받으려고 했던 그 과정을 잘 안다. 나도 (최병렬을) 도와줬다. 때론 갖은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됐었다.
홍준표? 이회창 전 총재가 참 좋아하던 사람이다. 서울 동대문에서 두 번 당선시켰다. 총재가 직접 챙기더라. 그 사람 그러면 안된다. 이방호, 내 고향후배다. 최근까지 내가 격려해줬다. 운영위원 경남도 몫 챙기는 데 도와줬다. 16대 때 현역 물리치고 공천받느라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다 안다. 인간사 기본은 휴머니티다. 인륜이다. 그걸 저버리면 안된다.”
하 의원은 자신이 이회창 전 총재 측근으로 분류되고, 지난 대선 패배 책임을 지게 된 데 대해서도 반대논리를 폈다. 지난 총선에 최병렬 대표가 선대위 의장이었고, 김문수 심사위원장은 기획단 핵심 멤버였다는 것. 책임을 져도 그들이 더 많이 져야 한다는 논리다.
하 의원의 이 같은 말들은 결과적으로 4년 전 허주(김윤환 전 의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말들이다.
허주는 당시 공천배제 소식을 듣고 하 의원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토로했다고 한다. 하 의원이 공천발표 직전 허주에게 “형님, 안될 것 같습니다”라고 전한 뒤 자신의 뜻이 아니었음을 강변하려 했으나 허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96년 총선 당시엔 허주가 공천심사위원장이었다. 당시 하순봉 의원은 허주 계보원으로 분류됐다. 하 의원이 최병렬 대표와 홍준표 이방호 의원 등 자신이 챙겨줬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감정을 토로했듯 허주도 당시 자신이 공천을 주었던 하 의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여겼다.
허주가 숨을 거두기 전 이회창 전 총재 등은 허주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민주당에도 비슷한 역사가 진행된 적이 있다. 권노갑 전 고문이 지난 2000년 정동영 의원(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퇴진 요구를 받았을 때다. 권 전 고문은 당시 엄청난 인간적 배신감을 토로한 바 있다. 96년 총선에서 MBC 기자를 하던 정 의원을 발탁하고 공천을 준 게 자신이었는데 이렇게 배신할 수 있느냐는 것. 정 의원이 정면으로 권 전 고문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당시로선 대단한 모험이었다. 천정배 신기남 의원 등이 정 의원의 리더십을 인정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권 전 고문은 아직도 정 의원에게 섭섭한 감정을 간직하고 있다. 최근 권 전 고문은 “내가 입을 열면 정 의원이 다칠 수밖에 없다”면서 정 의원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정 의원의 사례는 한나라당의 경우와 다소 다르다. 한나라당은 이미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권력의 무상함’을 드러낸 반면, 정 의원의 경우는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실력자에게 항거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역사적 평가도 다를 수밖에 없다.
민주당에서 지난 2000년 당시 공천 작업을 주도했던 인물로 정균환 의원과 김민석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정균환 의원의 권세는 대단했다. 영입인사들은 대부분 정균환 의원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으로 이동한 초선의원 상당수는 지금도 정균환 의원에게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김민석 전 의원은 정균환 의원의 각별한 애정 속에 공천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다. 하지만 그도 지금은 겨우 민주당 공천을 받았으며, 당선 자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한때 공천을 좌지우지했던 인물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비슷하다. 3김씨처럼 정당을 창업한 ‘소유주’가 아닌 한 짧은 기간 휘두른 권력의 칼은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나라당 공천을 좌지우지한 김문수 위원장은 4년 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