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27일 보도사진전에 참석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오른쪽)와 조순형 민주당 대표가 정치현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
야권의 탄핵 움직임은 지난 2일 심야 정치 소동을 통해 선거법수정안의 국회 처리가 무산된 사건과 무관치 않다.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야합’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여야 간의 합의를 사실상 끝낸 선거법수정안을 기습 상정해 국회를 파행으로 몰고간 것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즉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추진을 노림수로 국회 파행의 공범이란 오명까지 뒤집어쓰면서 한-민공조를 밀어붙였다는 관측이다. 그럼 왜 탄핵일까. 빗발치는 여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굳이 탄핵을 추진하려는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탄핵 발언을 꺼낼 당시의 야권 분위기대로라면 탄핵 발의의 정당성은 접어두더라도 탄핵 발의 자체가 가능할지도 불투명했다. 가장 단합되어 있어야 할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대론자들이 적지 않게 포진돼 있다. 추미애 설훈 의원 등은 연일 ‘한-민공조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민적 공감대가 미흡하다’ ‘선거법 위반도 탄핵감은 아니다’며 개인적으로 반대한다는 이유를 밝혀 왔다.
한나라당 내부의 상황은 더욱 추스르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노장파는 찬성하고 소장파는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원희룡 장광근 권오을 남경필 의원 등 알 만한 소장 개혁그룹들은 거의 신중론자들이다.
“탄핵은 최후의 극단적 수단”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구속중인 의원들과 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은 의원들도 많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지도부 뜻에 절대복종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의원 수가 40명에서 50명쯤으로 추산됐다. 탄핵에 찬성할 양당 의원 수는 기껏 1백50여 명에 불과한 지경이었다. 탄핵안 의결에 필요한 1백81석을 채울 수가 없는 숫자다.
특히 한나라당의 경우 수일 앞으로 다가온 전당대회 때문에 지도부가 당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지도부는 탄핵 카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다. 최병렬 대표는 8일 상임운영위원회에서 “기필코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뒤늦게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홍사덕 총무는 애초에 “의결이 불투명하다고 해서 뒤로 물러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선 선거법 국회 처리 무산 직후 정치권에서는 흘러나오기 시작한 ‘탄핵 후 분권형 개헌 추진’ ‘대통령과 책임총리 간의 권력분산 개헌’ 시나리오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두 당 지도부가 궁극적으로는 분권형 개헌을 향한 반(反)노무현 전선 구축을 위해 무리수를 써 가면서 한-민공조를 시도하려는 것 아니냐는 것으로 ‘왜 탄핵이냐’에 대한 해답이 모아진다.
한나라당 홍사덕 원내대표의 지난 3일 의원총회 발언은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앞으로 민주당과 함께 풀어나가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려진 대로 홍 총무는 ‘분권형 대통령제주의자’다. 그는 아예 “국정운영은 고건 총리가 더 낫다는 사람들도 있다”며 노무현 대통령은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의 심중을 내비쳐 왔다.
▲ 지난 2월9일 홍사덕 한나라당 원내총무(뒷모습)와 유용태 민주당 원내대표가 원내 대책을 협의하고 있다. | ||
실제로 탄핵 언급이 총선 후 개헌이라는 정략적 발상에서 시작된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야권 일각에서는 이를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민주당 김경재 의원은 “구태여 변명하지 않겠다. 인정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정균환 전 총무는 더욱 노골적으로 “한-민공조는 미래를 위해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조순형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지난달 24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마쳤으며 국민의 이해를 얻으면 탄핵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대표는 이날 총선 후 민주당 주도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추진할 뜻이 있음을 재확인했다. 최근 조 대표가 “오만불손한 독재의 길로 가는 최고권력자를 바로잡기 위해 탄핵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 위에 있다.
양당 간에, 구체적으로는 조순형 민주당 대표와 홍사덕 한나라당 총무 간에 밀약이 이미 성립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조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조 대표의 요즘 고민은 대통령의 전횡을 어떻게 막느냐에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국회를 개혁파와 반개혁파로 나누고 관권선거로 협공을 하는 정치권력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며, 이런 모습이 재연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 연장에서 조 대표가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와 홍 총무 등과 만나 대타협을 이뤘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현 야권 지도부에게 대통령 탄핵안이 반드시 의결되야 할 필요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탄핵논쟁이 한-민공조의 거름이 되고 이를 통해 개헌 논란이 촉발된다면 그로서 충분하다는 게 야권 지도부의 실제 생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홍사덕 총무는 “설혹 국회에서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은 선거를 통해 계속될 것”이라며 탄핵 카드를 빼들었던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이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탓일까. 열린우리당은 앞으로 ‘야권 개헌 음모론’을 본격적으로 불지피겠다는 구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최고위 당직자는 “조순형과 홍사덕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는 게 틀림없다”며 한-민 공조설에 이어 조-홍 밀약설을 대대적으로 유포할 의중임을 내비쳤다. 민심의 역심판을 유도한다는 대책인 셈이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