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병은 빈센트 반 고흐를 괴롭혔던 것과 같은 ‘측두엽 간질’인 것으로 밝혀졌다. 왼쪽은 고흐의 ‘자화상’. | ||
국립서울병원은 지난 93년과 95년에 법원과 경찰의 의뢰를 받아 유영철의 정신질환 증상에 대한 소견서를 써준 적이 있다. 당시 국립서울병원측은 유씨가 ‘측두엽 간질’을 앓고 있으며 이 병이 정신적 이상 상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판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정신과 전문의가 쓴 글을 통해 측두엽 간질이 심각한 정신과적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추후 논란이 예상된다.
국립나주병원의 윤보현 소아청소년 정신과장이 쓴 ‘빈센트 반 고흐와 간질병’이라는 글에 따르면 19세기 말 인상파 미술의 거장 반 고흐도 같은 측두엽 간질을 앓았다고 한다. 반 고흐와 유영철은 서로 유사한 점이 많아 반 고흐의 삶을 비추어 보면 유영철의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과연 이 측두엽 간질은 어떤 병일까.
고흐는 어려서부터 변덕스러우며 고집이 세고 골칫덩어리였다고 한다. 윤 과장은 이 글에서 “측두엽 간질로 인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급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불미스런 행동을 하게 되어 대부분의 장소에서 그는 기피인물로 취급받았으며 심지어는 테오(고흐의 동생)와도 밤을 세워 다투곤 하였다”고 적고 있다.
유영철이 두 번의 결혼실패로 좌절을 겪고 가족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 못하며 골칫덩어리가 되었던 것과 유사한 부분이다. 유영철이 쓴 가족들의 단란한 시간을 갈구하는 시를 보면 그 역시 가족들과의 갈등을 못내 아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테오가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는 “형은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여. 한 사람은 뛰어난 재능에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이기적이고 거친 성격을 가진 사람인데, 두 사람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서로 다른 말과 행동을 하거든”라는 구절이 담겨 있다고 한다. 유영철의 꼼꼼한 스크랩과 정밀한 스케치를 보면 ‘살인 폭탄’인 유씨가 다른 한편으론 얼마나 뛰어난 재능과 섬세한 성격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다.
윤 과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고흐의 이러한 다중인격적 특질을 ‘양극성 장애’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주요 증세로는 극심한 분노감정을 포함한 기분의 변덕, 행동의 다양한 변화, 그리고 성적인 행동이 지나치게 감소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유영철은 범행대상을 집 안으로 데리고 왔다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그냥 보내주는가 하면 범행대상과 수법을 바꾸기도 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성관계도 갖지 않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의학계 일각에선 이러한 성격의 변화는 간질 발작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는 것이 일반적인 간질발작이지만 모든 발작이 이처럼 외부적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외적인 증상 없이 내부적으로만 간질발작이 일어나 남들이 알아채지 못한 채 성격이 변화하기도 한다는 것. 이럴 경우 뇌의 손상으로 인한 기능이상으로 정신적 장애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 과장은 자신이 담당한 측두엽 간질 환자 중 발작이 일어난 뒤 3일간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환자는 발작 후 순천에서 광주까지 3일 동안 걸어갔으나 자신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에 살인 또는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모든 측두엽 간질 환자가 이런 발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본인도 모를 정도로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도 하지만 며칠간 기억을 못할 정도로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해 그 증세는 천차만별이다.
의학계에선 아직도 간질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출산시에 합병증 또는 성장기에 두뇌에 강한 충격을 받으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기생충이 뇌에 침투한 것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두뇌손상 때문에 다른 정신과적 장애가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측두엽 간질 그 자체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병은 아니라고 한다.
유영철이 주장하듯 자신의 병이 치명적인 불치병은 아니지만, 이런 측두엽 간질의 일반적인 증상 때문에 유씨가 재판과정에서 정신질환을 이유로 극형을 면하려고 시도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후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유씨에 대한 정밀한 정신감정이 필요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