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저녁 DJ는 노 대통령 탄핵안 가결과 관련해 짧은 논평을 냈다. 지난해 2월 퇴임 후 처음으로 국내 정치 상황과 관련된 심경을 내비친 것이다. DJ는 김한정 비서관을 통해 “오늘의 탄핵 사태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우려하며, “여야 정치인들은 이제라도 각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사태를 수습해 나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정치적으로는 일체의 의사 표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김 비서관을 통해 전했다.
DJ가 오랜만에 정치적 발언을 했지만 지극히 중립적인 논평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탄핵안 가결 이후 ‘DJ맨’ 중 일부가 민주당을 탈당하고, 또 일부는 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정가 일각에서 ‘김심(DJ의 의중)=우리당’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어 ‘김심’의 진심을 둘러싼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DJ의 정치적 스탠스는 ‘중립’이었다. 이번 탄핵안 사태와 관련해서도 DJ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한정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의 ‘국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12일 발표한 논평 이외에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오늘의 난관을 극복할 저력이 있다고 믿고 계신다”고만 전했다. 이처럼 동교동의 ‘공식 입장’은 ‘확고’하다. 탄핵안 사태가 심각한 상황이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그럼에도 지난 12일 탄핵안 투표에 김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민주당 의원이 참석한 것을 놓고 ‘김심이 민주당으로 기운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일었다. 김 의원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해서 “김 의원이 탄핵안 투표에 참여한 것은 ‘동교동’과 전혀 무관하다”며 “민주당 소속 의원으로 당론을 따른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사실 이번 탄핵안과 관련해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일 민주당의 심야 의원총회에서 지도부는 탄핵안 발의를 위한 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 의원은 “좀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서명을 미뤘다가 결국 지도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8일에서야 서명했다. 그만큼 김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장남이라는 ‘특수 신분’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김 의원이 전남 목포 지역구를 포기하고 비례대표 출마를 결심했기 때문에 당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4일에는 ‘동교동계의 막내’로 불리는 설훈 의원을 비롯해 조성준·정범구·박종완 의원 등이 성명서를 통해 “잘못된 탄핵안 가결에 대해 어떤 변명으로도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며 “국가적 비상사태를 초래한 지도부는 총사퇴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DJ비서 출신의 정치인으로 DJ의 심중을 잘 헤아리는 인사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진 설 의원이 ‘당 지도부 사퇴 카드’를 들고 나오자, ‘김심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설 의원은 이와 관련해 “동교동과의 사전교감은 전혀 없었다”며 “처음부터 탄핵안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으나, 당 지도부에서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아 어마어마한 역풍을 맞게 돼서 지도부 사퇴를 주장한 것”이라고만 말했다.
▲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설훈, 조성준 의원(위) 정범구, 박종완 의원(아래). | ||
일각에서는 이들의 탈당 결행에 ‘김심’이 실린 것이 아니냐고 보고 있다. 고재방 전 실장은 이와 관련해 “탄핵안이 처리되는 것을 보고 민주적인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생각해서 탈당계를 제출했다”며 “한민(한나라당-민주당) 공조는 말도 안되는 군사정권 시절의 폭거와 같다”고 비난했다.
‘김심’이 반영된 탈당이냐는 질문에는 “김 전 대통령은 국내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 (내가) 주기적으로 찾아가 뵙기는 하지만 이번 탈당 문제로 상의한 적은 없다. 탄핵이 통과한 날(12일) 저녁에 공식 발표한 것이 전부라고 보면 된다. 그날 발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며 ‘김심’과 자신의 탈당과는 무관함을 역설했다.
그런데 14일에 강현욱 전북지사가, 15일에는 박태영 전남지사가 민주당을 탈당해 우리당에 입당했다. ‘DJ의 정치 고향’인 호남지역 단체장들까지 속속 우리당행에 나서면서 ‘김심’이 우리당에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에 힘이 실리는 듯한 분위기다.
돌아보면 지난 2월 말에도 ‘김심’ 논란은 있었다. DJ를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는 박선숙 전 청와대 대변인이 환경부 차관으로 입성한 것을 놓고 정가에서 말들이 많았던 것. DJ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박 차관은 지난해부터 민주당과 우리당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일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참여정부에 동참하자 자연히 ‘김심’이 우리당에 실린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던 것.
박 차관은 이와 관련해 “그분(DJ)의 의중에 관해서는 나한테 묻지 말라”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정치권에서는 박 차관이 처음 차관직을 제의를 받았을 때 동교동을 찾아가 보고를 했으며, DJ로부터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라’는 답변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차관은 탄핵안 가결에 대해서도 “나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DJ 측근들은 한결같이 “DJ는 현실 정치를 떠났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탄핵안 가결 이후 ‘김심’이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헌재 전원재판부는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을 재판장으로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 가운데 6명이 탄핵을 결정하면 노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야 할 처지다. 그런데 9명의 재판관 가운데 윤영철 헌재소장과 송인준·주선회 재판관 등은 DJ가 대통령 재직 시절 지명한 재판관들이다.
물론 재판관이 지명권자의 의중에 따라 탄핵 심판을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견해. 그렇지만 법조계 일각에선 DJ가 지명했던 3명의 재판관에게 ‘김심’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헌재가 고려할 수밖에 없는 민심의 한 축에는 호남이 있고, 그리고 호남의 한 가운데엔 여전히 DJ가 있다.